인생 드라마 만났다면, 대본집으로 한 번 더

인생 드라마 만났다면, 대본집으로 한 번 더

기사승인 2022-04-16 06:04:01
‘나의 아저씨’ 대본집. 세계사

드라마 대본집의 위상이 달라졌다. 대본집을 구매해 종영한 드라마의 여운을 느끼는 독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드라마를 소유하고 싶은 팬들은 대본집을 일종의 드라마 굿즈처럼 여기는 분위기다.

드라마 대본집의 판매량부터 달라졌다. 김영사에 따르면 지난 2월 출간된 SBS ‘그 해 여름은’ 대본집은 예약판매 당시부터 베스트셀러 1, 2위에 이름을 올렸고 10만부 이상 판매된 것으로 알려졌다. 드라마 종영 4년 만에 출간된 tvN ‘나의 아저씨’ 대본집은 예약판매로 1만부를 팔며 베스트셀러 4위까지 올랐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올해 1월1일부터 지난달 14일까지 드라마·시나리오 분야 판매량은 지난해 대비 2.7배 상승했다. 구매 독자 연령은 20대와 30대가 36.2%, 28.5%으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고, 여성 74.1%와 남성 25.9%로 여성 비중이 높았다.

tvN ‘갯마을 차차차’ 대본집

드라마 대본집, 과거와 다르다

출판계도 대본집의 인기를 실감한다. 예전에는 미디어와 연관된 콘텐츠가 출간되면 팬들에게 하루 이틀 정도 반짝 인기를 얻는 수준이었다. 요즘은 다르다. 예스24 뉴미디어팀 박숙경 과장은 “드라마 대본집이 종합 베스트 순위에서 꽤 오랫동안 높은 순위를 유지하는 건 드문 일”이라며 “나의 아저씨’처럼 방영된 지 오래된 드라마의 대본집이 1위에 오르기도 한다. 대본집 판매량도 전년 대비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판매량이 늘자 출간되는 대본집 수도 늘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드라마 대본집은 매해 50~60편 정도 출간됐지만, 지난해 82종으로 크게 늘었다. 올해도 JTBC ‘기상청 사람들’, tvN ‘서른, 아홉’, SBS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등 11개 드라마가 대본집을 출간했다. ‘나의 아저씨’처럼 종영한 지 오래된 드라마부터 왓챠 ‘좋좋소’처럼 웹드라마에 가까운 작품도 대본집을 출간한다.

출판사의 움직임은 바빠졌다. 출판사 간 경쟁이 치열해지며 더 빠르게 선점하는 분위기다. tvN ‘갯마을 차차차’ 대본집이 처음으로 온라인 서점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출판사 북로그컴퍼니 관계자는 “‘갯마을 차차차’ 대본집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기 전엔 드라마 방영 초반에 제작사로 대본집 제안서를 넣어도 제작이 가능했다”며 “요즘 드라마 제작사에 연락하면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제안서를 많이 넣어놓은 상태다. 드라마 시작 전부터 대본집이 계약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드라마를 소비하는 독자층도 달라졌다. 북로그컴퍼니 관계자는 “이전엔 드라마 지망생이나 좋아하는 드라마를 분석하고 싶은 독자들이 많았다”며 “최근엔 드라마와 배우 팬들에게 굿즈 개념이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예스24 박숙경 과장은 “좋아하는 드라마를 하나의 물성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며 “좋아하는 것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시청자의 심리가 대본집 구매가 이어진다”고 전했다.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나의 아저씨’ 대본집. 예스24 캡처

대본집 구매 이유? 가지각색

드라마 시청자들이 대본집을 구매하는 이유는 다양했다. 좋아하는 작품을 소장하고 싶은 마음은 대본집을 사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최근 ‘나의 아저씨’ 대본집을 구매했다는 노모(35)씨는 “평소 드라마를 잘 보지 않지만 ‘나의 아저씨’를 인생 드라마라 여겨 구매했다”며 “일반 단행본에 비해 가격이 높지만, 저에겐 선물 같은 책이라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tvN ‘아는 와이프’ 대본집을 갖고 있는 박모(32)씨는 구매 이유로 “작가의 영향이 크다”며 “‘아는 와이프’를 쓴 양희승 작가님을 존경하고 그의 글을 좋아해 구매를 결정했다”고 털어놨다.

대본집을 사서 읽은 다음, 대본과 비교하며 다시 드라마를 보는 것도 드라마를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다. “좋아하는 드라마가 있으면 LP 플레이어가 없어도 LP 버전으로 나온 OST를 산다”는 황모(32)씨는 최근 SBS ‘그 해 우리는’과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대본집을 구입했다. 황씨는 “대본집을 읽고 드라마를 다시 본다”며 “대본에 있던 장면이 방송에서 삭제되면 왜 없앴는지 아쉬워하기도 하고, 반대로 어떤 장면은 삭제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한다”고 설명했다.

배우도 드라마 대본집을 구매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다. 지문이 자세히 적힌 글을 읽으면 드라마에서 배우가 연기한 인물의 감정선을 더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배우 이민호의 팬인 양유정(26)씨는 “대본집을 보면 글로 써진 대사를 배우가 어떻게 연기했는지, 어떤 애드리브를 했는지 등 연기 방식을 알 수 있어서 좋다”며 “이 장면에선 배우가 어떻게 연기했는지 생각하면서 드라마를 다시 곱씹어보는 재미도 있다”고 말했다.

2019년 종영했지만 아직 출간되지 않은 JTBC ‘멜로가 체질’ 대본집이 나오길 기다리는 이모(34)씨에겐 드라마 대사가 구매 이유다. 이씨는 “‘멜로가 체질’은 대사가 주옥같은 드라마”라며 “영상으로 보면 좋아하는 장면이 금방 지나가지만, 책은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다. ‘멜로가 체질’은 에필로그에 소설처럼 정리해주는 문장이 좋아서 (대본집이) 소장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대본집을 구매하는 행위엔 좋아하는 것을 후원하는 마음이 숨어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웹소설학과 홍석인 교수는 “대본집을 구매하는 건 소장의 의미도 있지만 후원의 의미도 크다”며 “무언가를 소비하고 소유함으로써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지지의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극장에 가지 못하지만 좋아하는 영화의 입장권을 사서 영혼만 보내는 ‘영혼 보내기’나, 왓챠 ‘시멘틱 에러’의 인기 덕분에 주간지 씨네21이 많이 팔린 도 팬덤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덧붙였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이준범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