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제약사가 개발·공급해 왔던 신약의 특허 회피에 성공하는 국내 기업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해외 기업이 독점했던 시장에 침투할 국산 제네릭 의약품이 등장할 전망이다.
제약사는 신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물질과 기술에 대한 특허를 출원한다. 특허가 등록되면 제약사는 향후 해당 신물질을 개발, 판매할 독점적인 권리를 보장받는다. 특허권의 존속기간은 20년인데, 신약개발은 통상적으로 10여년이 소요된다. 제약사들이 개발에 착수함과 동시에 물질특허를 출원하면 임상시험과 품목허가를 거쳐 출시 단계에 이른 시점에는 특허 기간이 10년 남짓 남는다.
실질적으로 시장에서 오리지널 의약품이 독주할 수 있는 시간은 10년보다 짧을 가능성이 크다. 특허무효심판, 소극적권리확인심판 등을 통해 경쟁 제약사들의 특허권 도전이 잇따르기 때문이다.
특허무효심판은 오리지널 의약품을 개발한 제약사가 가진 특허권을 없애, 제네릭 의약품을 자유롭게 제조할 수 있는 상태를 조성하는 전략이다. 소극적권리확인심판은 기존 특허와 유사하지만, 차이점이 뚜렷한 다른 기술을 개발했음을 공인받는 절차다. 기존 특허권자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았음을 인정받아 특허권을 회피해 제네릭 의약품을 출시하는 시장 침투 방식이다.
가령, A사의 신약에 포함된 a물질의 특허권이 2030년까지 보장된다고 해도, 그에 앞서 권리를 상실할 여지가 많다. 경쟁사인 B사가 a물질에 대한 특허무효심판을 제기해 특허를 무효화한다면, B사를 비롯한 누구나 a물질을 제조해 제네릭 의약품을 출시할 수 있다. B사가 소극적권리확인심판을 받아 특허권 회피에 성공하면, B제약사만 a물질을 제조해 제네릭 의약품을 출시할 수 있게 된다.
현재 국내에서 특허권으로 보호되는 의약품은 적지 않다. 특허청 특허목록에 등재된 의약품은 지난해 기준 총 1592개로 집계됐다. 이들 의약품 중 합성의약품은 1320개(82.9%)로 가장 많다. 생물의약품은 245개(15.4%), 한약(생약)제제는 24개(1.5%)로 일정 비중을 차지했다. 합성의약품은 화학물질의 합성을 통해 만들어지는 약이다. 생물의약품은 혈액, 세포 등 생명체에서 유래한 원료를 사용하는 약이다.
특허권등재자를 국적으로 구분하면, 국내사와 외자사의 격차가 벌어진 실정이다. 특허목록에 등재된 1592개 의약품 중 국내 제약사가 등재한 의약품은 524개(32.9%)다. 나머지 1068개(67.1%)는 모두 외국계 제약사가 등재한 의약품이다. 특허(1297개)를 기준으로 보면, 유럽과 미국이 각각 516개(39.8%), 330개(25.4%)로 선두를 점하고 있다.
국내 제약사의 비중은 증가세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식품의약품안전처 보고서에 따르면, 등재의약품 중 국내 제약사가 등재한 의약품의 비중은 앞서 2012년 37%에서 2017년 41.8%까지 증가했다. 하지만 이후 2018년 37.9%, 2019년 32.5%으로 점차 하락했다. 2020년에는 41.7%로 반등했지만, 지난해 다시 30% 선으로 축소됐다.
다만, 최근 국내 제약사들이 속속 특허 회피에 도전하고 있다. 국내 시장에서 외국계 제약사가 독점했던 분야에 침투할 기반이 마련된 셈이다. 한미약품과 대웅제약이 노바티스의 ‘엔트레스토’ 특허 회피에 성공했다. 엔트레스토는 노바티스가 개발한 심부전 치료제로, 총 5개의 특허권이 보호하고 있다. 최근 한미약품과 대웅제약이 회피한 제제의 특허 만료 시점은 2028년이다.
보령제약과 대웅제약은 노바티스의 ‘타시그나’를 겨냥해 특허 회피에 도전했다. 타시그나는 5개의 특허로 보호되는 만성 골수성 백혈병 치료제다. 특허 가운데 가장 먼저 도래하는 만료 시점은 내년 8월이다. 국내 제약사들은 이를 제외한 나머지 특허에 대해 소극적 권리범위확인 심판을 청구했다. 인용재결이 나오면, 내년 8월부터 타시그나의 제네릭 제품을 출시할 수 있는 셈이다.
삼진제약은 얀센의 ‘옵서미트’ 특허 회피를 시도하고 있다. 옵서미트는 폐동맥고혈압 치료제로, 2개의 특허가 보호하고 있다. 특허 만료일은 각각 오는 2027년 10월, 내년 3월이다. 삼진제약은 2027년도에 만료되는 특허에 대한 심판을 청구했다. 인용재결을 받으면, 삼진제약은 내년 3월 이후 옵서미트의 제네릭 제품을 출시할 수 있는 위치를 점하게 된다.
한성주 기자 castleowner@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