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70년 4개월을 집권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8일(현지시간) 96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왕실의 상징적인 존재이자 영국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여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왕위를 이어 받은 찰스 3세(74)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자신을 향한 국민들의 냉담한 마음을 돌려세우고, 지속적으로 거론되는 ‘왕실 회의론’을 잠재워야 할 과제를 떠안았다.
찰스 3세는 64년간 영국 왕위 계승 1순위인 왕세자로 활동하며 환경보호 등 다양한 대외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이혼 과정에서 불거진 커밀라 파커 볼스와 불륜 문제,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거액 기부금 수수 등 여러 추문에 휘말려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다이애나 왕세자비와의 이혼 문제는 꼬리표처럼 찰스 3세를 따라 붙었다. 찰스 3세는 케임브리지대를 나온 뒤 공군과 해군에 복무하고 1981년 다이애나비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은 윌리엄과 해리 왕자 두 아들을 낳았지만 1996년 이혼했다. 찰스 3세가 다이애나비와 결혼하기 전부터 사귀었던 커밀라 파커 볼스와 불륜 관계를 계속 이어왔기 때문이다.
이혼 후 이듬해인 1997년 다이애나비는 프랑스 파리에서 파파라치에게 쫓기다가 교통사고로 숨졌다. 추모 열기가 끓어오르면서 찰스 3세를 향한 부정적인 여론도 치솟았다. 찰스 3세는 불륜 상대였던 커밀라와 2005년 재혼했다. 올해 초 엘리자베스 여왕이 커밀라를 ‘왕비(Queen Consort)’로 인정해주길 바란다고 호소했지만 영국인들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실제로 지난 5월 여론 조사기관 유고브의 조사에 따르면 찰스 3세는 56%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는 여왕(81%)은 물론이고 아들인 윌리엄 왕자(77%)보다 훨씬 뒤쳐진 것이다.
찰스 3세에겐 ‘군주제 폐지’ 여론을 잠재워야 할 과제도 있다.
지난 6월 유고브의 조사에 따르면 ‘100년 후에도 군주제가 유지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41%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특히 18~24세 연령층에서는 “군주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답변이 3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군주제가 영국에 이롭다’는 응답도 2012년 73%에서 56%로 줄었다.
지난 6월 치러진 여왕의 즉위 70주년 기념식인 ‘플래티넘 주빌리’ 첫 행사 ‘군기분열식’의 시청자는 750만 명으로 과거 왕실의 주요 행사 때 시청자보다 훨씬 줄었다.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윌리엄 왕세손이 2011년 결혼할 때는 무려 2600만 명의 시청자가 지켜본 것과 대조적이다.
여왕의 차남 앤드루 왕자의 미성년자 성폭행 의혹, 왕실 내 인종차별 의혹을 제기하며 지난해 독립을 선언한 해리 왕손 부부의 행보 등으로 왕실 이미지가 크게 하락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군주제 폐지 운동 단체 리퍼블릭은 “여왕이 승하하고 나면 영국 왕실은 껍데기만 남을 것”이라며 “찰스 왕세자가 최선이 아니다. 우리가 국가원수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문대찬 기자 mdc0504@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