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사고가 대규모 사상자를 일으킨 이유에 대해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이 모이는 가운데, 먼저 재난대응지침부터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의료계는 책임소재를 따지기 보다는 향후 현장에서 손 쓸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 전 안전에 대한 대비책이 시급하다는 입장이다.
대한응급의학의사회(이하 의사회)는 3일 용산 드래곤시티호텔에서 대한응급의학의사회 추계학술대회 및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태원사고와 같은 대형 재난을 예방하기 위한 재난대응지침 개선 방향을 제시했다.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의사회 회장은 “이번 재난은 안전의식 부재와 안일한 대응으로 일어난 안타까운 재난”이라며 “재난 특성 상 이미 사건이 벌어진 후에는 대응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지금은 책임소재와 잘잘못을 가릴 때가 아니다. 재난대응에 대한 평가와 분석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준비하는 것이 필요한 때”라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재난발생 이후 초기 적절한 대응이 의료인들의 몫이라면, 준비하고 지원하는 일은 정책당국의 책임”이라며 “외국의 지침과 대응방안을 무조건 우리나라에 들여온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국내 현실에 맞는 재난대응지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의사회는 정책당국에 △다중이용시설의 의료지원계획 마련 △심폐소생술 자격증 일반인 교육 강화 △재난대응에 대한 국가 연구용역 확대 필요성을 주장했다.
먼저 의사회는 다중이용시설이나 경기장, 스포츠 레저시설 등 지속적으로 안전사고와 인명사고가 발생해 왔지만 이에 대한 적극적인 조치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특히 주최자가 없는 행사의 경우 기본적인 안전조치마저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석재 대한응급의학의사회 홍보이사는 “콘서트 등 주최자가 있는 행사는 혹시 모를 응급상황에 대비해 구급차나 상비 의료인, 응급구조사가 있다. 지침이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이태원 사고처럼 주최자가 없는 행사는 지침이 없어 의료지원이 전혀 없었다”라며 “일정 숫자 이상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는 심층 안전평가를 실시하고, 정부·지자체 등에서 응급의료가 가능한 전문인을 한 명이라도 구비해놔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일반인의 심폐소생술(CPR) 의무 교육 필요성도 제기됐다. 당시 사고 현장처럼 수 백 명의 환자가 한 번에 심정지가 왔을 때 누구든 달려와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대비해야한다는 의견이다.
대한심폐소생협회와 대한응급의학회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매년 심폐소생술 교육과 캠페인을 벌이고 있지만, 자격증 취득 및 유지자에 대한 보상이 없어 보급확대에 어려움이 있는 상황이다.
최 홍보이사는 “외국의 경우 의료인 뿐만 아니라 교사, 공무원 등 다수 사람들을 상대하는 직종에서는 심폐소생술 자격증이 의무화돼 있고, 취업 시 인센티브를 주는 곳도 있다”며 “국내에서도 우선 모든 공무원에게 의무적으로 심폐소생술 자격증을 유지하도록 하고, 학생들의 교육과정에 심폐소생술 실습을 장려, 자격증 유지자에게 다양한 보상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재난대응 대책마련을 위한 연구용역도 확대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의사회에 따르면 재난은 발생장소의 위치, 교통, 인구, 환경 등 지리적인 요인들을 포함한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일어나는 만큼 각각 다른 대응 방안이 필요하다. 따라서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하려면 수많은 고민과 연구의 근거들이 모여야 한다. 외국에서는 과거 수십 년 동안 이어온 연구 결과를 토대로 탄탄한 대응책을 만들어 왔다.
최 홍보이사는 “국내는 재난 관련 연구용역들이 많지 않고, 같은 주제가 반복되기도 한다. 국민들이 보기엔 재난상황에 국가가 충분히 대응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연구 방향에 대해 반성해봐야 한다”며 “현장 목소리를 담고 있는 건지, 응급의료 전문가들에 의한 실질적 의료대응 체계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 냉철하게 평가하고 장기적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재난 연구와 정책수립은 개인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한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며 “지금이야말로 정책당국은 전문가들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여야한다”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지금 응급의료현장 속 의료진들은 지난 3년간 묵묵히 역할을 수행해왔고, 쉴 시간도 없이 재난현장에 투입되고 있다”며 “재난대응에는 비용이 든다. 더 많은 노력과 투자만이 미래에 닥칠 재난을 예방할 수 있다. 졸속대책으로 마무리하지 않고 느리더라도 확실한 변화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박선혜 기자 betough@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