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프트’ 김혁규(DRX)가 7수만에 자신의 꿈에 도달했다.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암시하기도 했던 그는 프로 데뷔 후 10년 만에 ‘LoL 월드챔피언십(이하 롤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의 소속팀 DRX는 이번 대회에서 철저한 ‘언더독(열세)’으로 통했다. 롤드컵 진출 티켓을 가까스로 따냈을 정도로 전력이 좋지 않았지만, 세간의 평가를 뒤집고 기적적으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플레이-인(예선)부터 대회를 시작한 팀이 결승에 올라 우승까지 차지한 건 DRX가 최초다.
난적을 차례로 꺾으면서 성장, 끝내 목표에 도달한 DRX의 ‘소년 만화’는 팬들에게 큰 울림을 선사했다. 특히 숱한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10년 간 우승만을 보고 달려온 김혁규의 이야기는 국내‧외에서 큰 화제를 낳았다. 장르의 경계를 넘어 이젠 도전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된 모양새다.
15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DRX 사옥에서 김혁규를 만났다. 지난 그룹스테이지 로그전(기사) 이후 약 한 달 만의 재회다. 그는 웃음이 만연한 얼굴로 “처음으로 게임 생각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며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아쉬움의 눈물이 성취의 눈물이 되기까지, 김혁규가 걸어온 만화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아래는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Q. 로그전 패배 후 첫 만남이다, 이젠 우승자의 신분으로 만났다. 달라진 일상이 궁금하다.
로그전 패배 이후에 처음 봬서 뭔가 재미있는 것 같다. 그 때까지만 해도 사실 말로는 ‘괜찮다, 괜찮다’ 했지만 상황이 좋지는 않았지 않나.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사람 일 잘 모르는 것 같다. 우승한 뒤로는 되게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또 기자님이 써주신 말 덕분에 본의 아니게 만화 캐릭터처럼 명언을 해버려서 그것도 되게 재미있다(웃음).
Q. 내가 그렇게 썼던가, 기억이 안 난다(웃음). 항상 LoL 생각만 하고 살지 않았나. 우승을 했으니, 이젠 내려 놓았나.
나는 항상 루틴처럼 LoL을 생각하거나 직접 플레이를 하거나, 관련된 영상을 봤다. 셋 중에 하나를 하루도 빠짐없이 해왔다. 정말 신기하게도 우승한 뒤로는 경기와는 동떨어진 순전히 내 재미만을 위한 영상을 봤다. 인터뷰 영상들도 많이 봤고, 사람들 반응이나 우리 경기를 지켜봤던 스트리머 분들, BJ분들의 영상을 되게 많이 찾아봤다. 정말 행복하다.
Q. 목 말랐던 우승이다. 문득 '내가 우승을 했다'는 사실이 상기될 때, 어떤 기분이 드나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려고 한다. 프로게이머이기 전에 나는 LoL이라는 게임을 하는 유저다. 이 게임에 나를 헌정하는 스킨(케이틀린)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꿈 같은 일이다.
Q. 정규리그 땐 연습 과정마저 좋지 않아 고민을 털어놓지 않았나. 이번 대회는 조금 달랐나?
연습 과정이 좋다가 안 좋았다. 팀원들은 어떤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롤드컵 안에서도, 우리가 다 승리하긴 했지만 위기 상황이 되게 많았다고 생각한다. 연습 과정에서 우리가 대회에 임하듯이 전력을 다해 게임을 하고 있는 게 맞나, 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정말로 대회처럼 하고 있어도 문제고, 그게 아니라면 무척 심각하다는 얘기를 팀원들과 했다. 그 상황 안에서 감독님이 주도해 중재를 되게 잘 해주셨다. 많은 위기를 겪었지만 그 과정 속에서 다들 더 단단해졌다.
Q. 결승전 상대였던 T1과 연습 경기에서 자주 패하면서 사기가 저하됐다고도 들었다.
이게 아무래도 팀 게임이다 보니까 결국 다섯 명이 다 자기 역할을 해줘야 게임을 이길 수 있다. 그런데 한 명씩 계속 어긋나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한 명만 똑바로 하고, 두 번째는 두 명만, 세 번째는 세 명만 똑바로 했다. 돌이켜보면 스크림 하는 과정에서 T1이 아니었더라도 당시엔 다 패배했을 만한 경기력이었던 것 같다.
Q. 그렇다면 실전에서 DRX가 연습 경기와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 비결은 무엇인가?
우린 이번 대회에서 숱한 위기 상황을 겪어왔다. 무엇보다 가장 큰 건 1경기를 지고 나서 대회장 안에서 피드백이 가장 빨리 이뤄졌던 거라고 생각한다. 밴픽의 피드백이든 인게임에서 못했던 것들이든, 그 수정 단계가 다른 팀에 비해서 굉장히 빨랐던 게 우리 팀의 장점이었던 것 같다.
Q. 롤드컵 진출 확률이 30%도 안 된다고 보았지 않나, 그렇다면 우승 가능성을 엿본 때는 언제인가?
16강 조별 예선(그룹스테이지) 때다. 그 때가 스크림이 제일 좋았다. ‘우리 팀 왜 이렇게 잘하지?’라는 생각을 했다. 정말 잘하면 우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 때 했다. 그러다 이후 스크림, TES전 패배 후에 조금 더 잘해야겠다, 잘하는 팀들이 많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웃음).
Q.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와 달리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압박감 없이 경기에 임하는 듯 보였다.
맞다. 게임에 대한 열정이 식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나라는 선수를 조금 풀어주려고 했던 것 같다. 여태까지는 내가 100% 완벽한 게 아니면 경기를 지건 이기건, 마음이 나갔건 그러지 않았던 기계처럼 하려고 했다. 경기를 이겼더라도 내가 완벽하게 하지 못했다면 ‘쉴 자격도 없는 데 왜 쉬냐’면서 나를 몰아붙였다. 마찬가지로 경기를 지면 ‘경기도 졌는데 뭘 쉬냐’며 또 몰아붙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조금은 인정했던 것 같다. ‘나는 기계가 아니고, 나도 지쳤구나’. 그런 걸 풀어주는 게 조금은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이 어느정도 편해졌다.
Q. 그래도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던 롤드컵 아닌가, 한 경기 한 경기 더욱 집착이 생겼을 법도 한데.
절실함 같은 게 좋은 성과를 거두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는 있겠지만, 결국 과하면 좋지 않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전의 실패들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얻었다. 이번에는 과거 지나치게 과했던 것들을 많이 덜어내고,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Q. 즐기면서 올라간 결승전, 어떤 각오로 임했나?
나는 1경기에 긴장을 하는 스타일이다. 1경기 시작하기 전에는 되게 긴장했는데 2경기, 3경기, 4경기, 5경기는 다 즐기면서 했던 것 같다. 특히 5경기에 들어선 순간엔 우리가 이길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여기까지 온 걸 보니,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 같았다. 우주의 기운이 모인 듯, 정말 막연하게 말이다.
Q. 우주의 기운이 모이다가 5세트 바론 스틸을 당하며 주춤했다(웃음). 침묵 가운데서 홀로 목소리를 내더라.
뭔가 체감상으로는 나 역시도 굉장히 긴 시간 침묵을 했던 것 같은데, 영상으로 보니까 그래도 (내가) 곧바로 말을 꺼내더라. 돌이켜 보면 나도 팀원들도 다 똑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진짜 우리는 안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이 처음에 들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을 모든 팀원들이 똑같이 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여기서 뭐라도 흐름을 바꿔야 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Q. 결승전, T1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밴픽 해석이 인상 깊었다
밴픽적으로는 바텀에서 주도권을 잡는 쪽이 되게 편했던 것 같다. ‘케리아(류민석⋅T1)’ 선수와 결승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모르고 바텀 구도 같은 걸 같이 정립을 많이 했었는데, 그러다 보니까 밴픽을 할 때 서로 많이 어려웠다. 물론 ‘카르마’라는 픽을 우리도 쓸 수는 있지만 그렇게까지 선호하는 픽은 아니었다. 그런데 T1 쪽에서 카르마라를 되게 적극적으로 쓰고 또 굉장히 잘해서 그게 좀 어려웠던 것 같다.
Q. 5세트, 라인전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직접 나서서 ‘바드’ 픽을 권한 이유는 무엇인가?
거의 즉흥으로 짰던 밴픽이다. 상대방이 ‘바루스’나 ‘케이틀린’ 중 하나를 먹을 줄 알았는데 ‘카르마’를 먼저 집더라. 당시 ‘럭스’와 ‘하이머딩거’가 밴이 되어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때 카르마를 상대로 주도권을 잡을 만한 픽이 남아 있지 않다고 느꼈다. 뭘 해도 주도권이 없을 거면 6레벨 궁극기를 맞췄을 때 연계도 좋고 시너지도 좋은 ‘케이틀린-바드’ 조합을 꺼내면 각이 예쁠 것 같았다. (조)건희가 연습을 안 해봤어도 잘 해낼 거라고 생각했다.
Q.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승의 순간, 헤드셋을 벗었을 때 세상은 어땠나
넥서스를 깰 때까지도 이걸 깨면 우승이라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웃음). 나는 이날 여태까지 늘 해오던 게임, 늘 해오던 대회, 그 중의 한 경기처럼 결승전에 임하고 있었다. 넥서스 HP가 딱 한 대 남았을 때에야 ‘이거 깨면 우승이지’라는 생각이 들더라. (깨고 난 뒤엔) 아무 생각도 안 들고 그냥 헤드셋 던지고 팀원들 끌어안고 뛰었다.
Q. 과거 눈물을 자주 흘렸다. 이번 대회에서도 자주 울었다. 눈물의 의미가 사뭇 다를 것 같다.
예전엔 되게 분하고 아쉽고, 그런 의미의 눈물을 많이 흘렸던 것 같다. 이번에는 그냥 해냈다, 해냈다, 나도 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되게 컸다. 오랜 시간 동안 의심이 섞인 목소리들을 들어왔는데 결국 결과로 보여줬다고 생각해서 좋았다. 그냥 좋아서 울었다.
Q. 반대편에선 친한 동생인 류민석이 오열했다, 그를 포옹하는 장면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팀으로서 함께 한 시간은 1년 밖에 안 되지만 내가 제일 아끼는 선수고 또 가장 친한 선수다. 얼마 만큼 우승을 하고 싶었는지 알고, 또 얼마만큼 잘하는 선수인 것도 알아서 되게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세상이 잘못 된 게 아니라면 민석이는 결국 우승을 할 수밖에 없는 선수라고 생각한다. 그냥 지금 하던 대로 하면 결국 우승할 것 같다, 민석이는.
Q. 개인적으로 4강 진출을 확정짓고 눈물을 흘린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날은 데프트의 생일이기도 했다.
나도 8강전이 제일 기억에 남는 것 같다. 내게 8강은 오랜 시간 동안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김혁규는 2014년 이후 지난 7년 간 8강에서 좌절했다). 8강만 넘으면 결국 다 우승할 수 있는 전력이 되는 팀들이라고 생각하는데, 항상 우승할 수 있는 전력이 되는 팀을 만들지 못해 떨어졌다. 이번에는 우승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다.
Q. 우승 인터뷰에서 나만 잘하는 것보다, 팀이 잘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더라. 과거엔 생각이 달랐나?
나는 플레이 적으로는 항상 팀 게임을 하려고 노력했다. 다만 플레이를 떠나 누군가 흔들리면 다른 누군가가 끌어주는 게 중요하다는 걸 올해 느꼈다. 내가 흔들리면 동료들이 끌어줬다. 너무 좋았다. 사실 롤드컵을 치르면서, 팀원 모두 돌아가면서 많이 흔들렸다. 그런데도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다들 잘 버텨줬다. 그런 면에서 우리 팀이 제일 잘하는 팀이라고 생각한다.
Q. 이번 대회를 치르면서, 특별히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
인게임 쪽으로는 ‘제카(김건우)’ 선수가 5명 중에 제일 기복 없이 상수로 잘해줬다고 생각해서 고맙다. 게임 외적으로는, 선수들보다 주목을 덜 받기 마련이지만 감독‧코치진이 바깥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잘해줬다. 그래서 정말 고맙다.
Q. 10년 커리어를 통틀어, 롤드컵에 다다르기까지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인가?
20년도 롤드컵에서 떨어졌을 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롤드컵에 왔는데 잘 한 경기는 생각도 안 나고 너무 허무했다. 남들보다 더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뒤처지는 느낌을 받았다. 부상까지 겹치면서 ‘내가 다시 경기를 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 8강에서 떨어지고 무대에서 나오는데 ‘내가 다시는 경기를 못 뛰겠다’, ‘이 경기가 내 마지막 경기였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너무 힘들었다.
Q. 그렇다면 ‘데프트’를 일으켜 세운 동력은 무엇인가?
고마운 사람들이 되게 많지만 당시엔 손대영 감독(현 한화생명e스포츠)님께 되게 감사했다. 21년도 당시 스토브리그에 원거리 딜러들이 많이 풀린 상황이었는데, ‘당장에 네가 그 선수들보다 못할 수 있지만 나는 너를 믿는다. 무조건 너와 같이 할 거다’라고 말해주셨다. 그게 정말 감사했다.
Q. 한편으론 데프트가 롤드컵 우승을 하면 후련하게, 박수 칠 때 떠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년 더 선수 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다. 리그 상황, 팀 전력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두렵진 않나.
나도 롤드컵을 치르면서 우승하면 정말 미련 없이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스트레스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 프로 생활을 하면서 정말 재미있었다. 롤드컵부터 이 모든 과정들을, 그냥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Q. 귀국해서는 바로 솔로랭크를 돌리더라, LoL이 지겹지도 않나(웃음).
막 기를 쓰고 게임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그렇게 많이 하지도 않았다. 이전까지는 휴가를 받으면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서 게임을 하는 게 당연한 일상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아무 생각 없이 한 판을 했다. 관성적으로, 몸이 ‘그냥 해’라고 해서 ‘알겠어’ 했다(웃음).
Q. 데프트의 내년 목표는 무엇인가?
내년엔 팀적인 방향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더 극한의 플레이를 해보고 싶다. 그게 팀적인 방향성을 해치면 안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올해보다는 1%라도 비중을 더 그 쪽으로 두고 싶다. 개인적인 욕심이어서 시즌이 시작되면 생각대로 될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당장에는 그렇다.
Q. 프로 커리어를 통틀어 올해 가장 길게 일했다. 모처럼 찾아온 휴식이다. 어떻게 보낼 건가?
여행을 가려 해도 (병역 문제로) 해외에 출국하는 데에 제한이 걸려 있다. 대회용으로 아껴둬야 해서 딱히 여행도 못 간다(웃음). 그냥 하고 싶은 게 없다. 요새는 누워만 있어도 행복해서 시즌이 들어가기 전까지 최대한 휴식을 잘 취하겠다. 행복하게 쉬고 있겠다.
Q. 데프트와 DRX의 여정에 감동을 받은 이들이 많다.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이들을 위해 격려해달라.
이번 우승으로 내가 주목을 받았지만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노력하는 분들도 계실 거다. 또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성취를 이루지 못하고 계신 분들도 있을 거라고 본다. 그래도 끝내 성취한 입장에서 말해보자면, 결국엔 그간의 노력들이 헛되지 않은 것 같다. 잘 안 되더라도, 나중에 성취할수록 마음은 더 기뻐지고 보람도 커진다고 생각한다. 포기하지만 않고 끝까지 하면 결국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파이팅 하시길 바란다.
문대찬 기자 mdc0504@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