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오르면 날카로운 관악기 소리가 귓가를 찌른다. 무대 위에 비스듬히 선 배우들은 흡사 좀비 같은 모습이다. 배경은 빈부격차가 극심하던 산업혁명 이후 영국. 인간성을 말살당한 서민은 짐승 취급을 당하거나 악당이 돼야 했다. 뮤지컬 ‘스위니토드’는 후자를 택한 이발사 이야기다. 가족을 빼앗기고 억울하게 추방당한 스위니 토드가 15년 만에 돌아와 광기 어린 복수를 벌인다.
지난 1일 개막한 ‘스위니토드’는 신경을 곤두세우는 스릴러에 블랙코미디 한 스푼을 곁들여 온갖 맛을 낸다. 토드의 핏빛 복수는 비릿한 맛을 내고 조잘대는 러빗 부인은 감칠맛을 더한다. 작품은 1979년 미국에서 초연돼 토니상에서 남녀주연상 등 8개 부문을 휩쓸었다. 한국에는 2007년 처음 소개됐다. 음울한 분위기와 낯선 음악 때문에 흥행하지 못하다가 오디컴퍼니가 2016년 선보인 새 프로덕션이 점차 입소문을 타 인기 뮤지컬로 자리 잡았다. 이번 시즌 공연 역시 프리뷰 티켓 7000장이 5분 만에 ‘완판’됐다.
주인공 토드는 한때 벤자민 바커로 불렸다. 그는 아름다운 아내 루시와 딸 조안나를 둔 솜씨 좋은 이발사였다. 탐욕스러운 터핀 판사가 루시를 탐내며 비극은 시작된다. 바커는 쫓겨났고 루시는 독약을 마신다. 터핀은 조안나를 수양딸로 삼는다. 목숨 걸고 탈옥한 뒤 토드라는 이름으로 돌아온 바커를 파이가게 사장 러빗 부인이 돕는다. 토드는 분노와 증오에 압도돼 이성을 잃고, 가난과 궁상에 지친 러빗 부인은 도덕을 버린다. 그렇게 칼끝은 터핀이 아닌 세상을 향하기 시작한다.
작곡가 故스티븐 손드하임이 정교하게 설계한 음악은 ‘스위니토드’의 진미를 맛보여준다. ‘브로드웨이의 자존심’으로 불린 뮤지컬 거장은 의도적인 불협화음으로 관객을 긴장시키고, 예측 불가능한 변박(變拍)을 써 불안감을 조성한다. 음악으로 캐릭터를 묘사하는 솜씨 또한 탁월하다. 러빗 부인의 수다스러운 성미는 잘게 쪼갠 박자로, 조안나의 불안정한 정서는 신경질적인 소프라노로 극대화했다. 극 중간중간 등장하는 앙상블 배우들의 코러스는 서늘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환기할 뿐 아니라, 잔혹한 시대상을 냉소하게 한다.
작품 곳곳에 녹아든 블랙코미디는 별미다. ‘스위니토드’는 인육 파이를 소재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잡아먹는 야만의 시대를 꼬집는다. 압권은 1막 마지막에 등장하는 노래 ‘어 리틀 프리스트’(A Little Priest). 러빗 부인이 “정치인 뱃살”로 만든 파이를 건네면 토드는 “뻔한 거지 뭐. 도둑놈과 사기꾼을 섞은 맛”이라며 진저리를 친다. “저건 혹시 재벌 2세 / 닳고 닳은 이 냄새는 딱 봐도 짭새”처럼 각운을 살린 가사와 “저 형체 귀족 같네 / 귀~ 족 같은 게 때깔 좋네” 등 펀치라인이 돋보이는 가사도 웃음을 유발한다.
6년 만에 ‘스위니토드’로 돌아온 전미도는 말 그대로 매력을 뿜어낸다. 억척스럽다 못해 비뚤어진 러빗 부인을 능청맞고 사랑스러운 인물로 살려낸다. 그는 관객을 웃기는 데만 능한 게 아니다. 한 줌 남은 인간성마저 거두고 냉혹하게 눈빛을 번뜩이는 장면에선 잔혹함에 소름이 돋는다. ‘스위니토드’에 새로 탑승한 이규형은 분노와 광기로 뒤틀린 토드를 담백하게 표현한다. 강필석과 신성록이 토드 역에 함께 캐스팅됐다. 러빗 부인은 전미도 외에도 김지현, 린아가 번갈아 연기한다. 공연은 내년 3월5일까지 서울 샤롯데씨어터에서 이어진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