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거 100주기에 출발한 한국 창작 뮤지컬 ‘영웅’이 올해 열네 돌을 맞았다. 안 의사 마지막 1년을 다룬 ‘영웅’은 스타 캐스팅에 기대지 않고 콘텐츠의 힘으로 장수해 ‘한국 뮤지컬의 자존심’으로도 불린다. 18일 서울 역삼동 한 식당에서 만난 ‘영웅’ 창작진과 배우들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와 멋진 음악, 화려한 안무가 어우러져 오랜 시간 사랑받을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이날 윤호진 예술감독이 들려준 ‘영웅’ 탄생 비화는 독특했다. 때는 2004년. 뮤지컬 ‘명성황후’를 만든 윤 감독에게 한 청년이 찾아와 ‘안 의사 의거 100주기를 기념한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처음엔 거절했다. 하지만 청년이 떠난 후에도 안 의사가 윤 감독의 머리에 맴돌았다. 윤 감독은 “안 의사를 다룬 기존 작품들은 동양평화 사상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 동양평화에 꽂혔다”고 했다. 윤 감독에게 불을 지핀 청년은 끝내 ‘영웅’을 보지 못했다. 2007년 세상을 떠나서다. 윤 감독은 “안 의사가 그 친구를 통해 ‘영웅’을 만들도록 동기를 유발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초연 때부터 ‘영웅’과 함께해온 배우 정성화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에게 이번 시즌은 특별하다. 지난해 12월 개봉한 동명 영화(감독 윤제균)에서도 안 의사를 연기해서다. 정성화는 2019년 ‘영웅’ 10주년 공연과 영화 촬영을 병행했다. 석 달 만에 몸무게를 10㎏ 넘게 줄인 탓에 공연 도중 실신하기도 했단다. 그는 “영화 ‘영웅’을 보시고 뮤지컬이 궁금해 공연장을 찾는 관객이 많다. 뮤지컬도 만족스럽게 관람하시도록 큰 책임감을 느끼며 무대에 오른다”고 했다. 영화는 누적 관객 265만(19일 기준)명을 돌파했다. 제작사 에이콤의 윤홍선 대표는 “영화 덕에 새로운 관객층이 뮤지컬로 유입돼 반갑다”며 “앞으로도 뮤지컬 영상화와 영화와 사업에 힘을 쏟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정성화와 함께 ‘영웅’ 대표 배우로 꼽히는 양준모는 남다른 소망을 뒀다. 뮤지컬 데뷔작 ‘금강’으로 평양 땅을 밟았던 그는 “문화가 정치를 뛰어넘는 경험이었다”며 “‘영웅’이 안 의사 고향인 황해도 해주가 있는 북한에서 공연되는 날을 상상한다”고 했다. “‘영웅’은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는 중요한 작품”이라고도 강조했다. 양준모는 안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을 당시와 같은 나이(만 31세)에 ‘영웅’ 무대에 처음 올랐다. 그는 “예전엔 강인하고 역사책에서 볼 법한 인물로 안중근을 표현했지만, 지금은 의거를 준비하던 안 의사가 얼마나 울고 힘들고 (가족과 친구를) 그리워하는지 보여주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영웅’은 다음 달 28일까지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관객을 만나고, 오는 3월부턴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로 발걸음을 옮긴다. 블루스퀘어 공연 관객을 합산하면 누적 관객수는 10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윤 감독은 “중국과 관계가 열려서 베이징이나 상하이 등 중국 주요 도시에서도 ‘영웅’을 공연하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양준모는 “내년에 ‘영웅’ 15주년을 맞는다. 때마침 안중근 역할에 새로운 배우가 합류하면 역대 안중근을 연기한 배우가 15명이 된다”면서 “15주년을 기념해 15명의 안중근이 한 무대에 올라 노래하면 멋지겠다”고 상상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