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젊어 한때 '씨ᄋ·ᆯ의 소리' 필진으로 일하면서 함석헌(1901~1989) 선생을 곁에서 잠시 뵌 적이 있다. 그분이 언제인가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셨다.
황희 정승이 어느 날 뜰을 거니는데 종 녀석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죽는시늉했다. 곁에 녀석에게 저 애가 왜 그러느냐고 대감이 물었더니, 저렇게 가끔 토사곽란을 일으켜 고생한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에게 좋은 약이 있지….”
그러면서 대감은 자신이 평소에 먹던 환약을 한 알 주었다. 그것을 받은 종 녀석은 황송해서 먹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값으로 치면 얼마인데….”
그래서 그 녀석은 그것을 먹지 않고 팔아 그 돈으로 병도 고치고 친구들과 술도 몇 잔 사 마셨다.
대감께서 그 일을 잊으셨으려니 생각될 무렵, 다른 녀석이 대감 앞에서 죽는시늉하고 다시 약을 받아 나가서 팔아 즐기며 놀았다.
그런 일이 잊을 만하면 또 벌어지자 대감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뢰었다.
“아무래도 저 녀석들이 아버님을 속이고 수작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황희 대감께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그 약은 아픈 사람의 입에 들어갔을 텐데, 그러면 됐지 않니?”
이것이 내가 함석헌 선생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황희 정승은 인간적인 허물이 많은 분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그가 정사(政事)에 탁월한 능력을 타고난 것을 알았기에 허물을 덮어주고 타일러 씀으로써 수성(守成)의 정치를 할 수 있었다.
이러면 정승보다 위대한 사람은 그를 알아본 주군이다. 나는 영웅주의자는 아니지만, 명군(明君)을 만나는 것은 그 시대의 나라와 백성에게 큰 축복이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simon@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