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무명 배우였다. 영화에서 그가 맡은 대사는 열 문장 남짓. 2분 만에 카메라를 벗어난 단역이었다. 반면 여자는 주인공이자 라이징 스타였다. 고작 23세 때 주연작을 들고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다. 달라도 너무 달랐던 두 사람이 14년 만에 한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만났다. 지난 10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연애대전’의 배우 유태오, 김옥빈이다.
“단역으로 만났던 배우를 주인공으로서 재회했다, 그런 데서 오는 낭만은 의외로 없었어요.” 지난 13일 서울 안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유태오는 이렇게 말하며 미소 지었다. “다만 많은 감독님, 배우들과 호흡했던 베테랑 옥빈씨가 ‘내가 작업한 드라마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즐거운 촬영장이었다’고 말해줘서 자부심이 들었어요.” 이런 유태오를 김옥빈은 “귀한 배우”라고 칭찬했다. 같은 날 근처 카페에서 마주한 그는 “유태오와는 예의나 격식을 따지지 않을 정도로 친해졌다. 작품을 대하는 태도와 열정이 남달라서 나도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여자들은 왜…” 묻는 이 남자, 출발은 짱구였다
유태오와 김옥빈은 카메라 밖에선 둘도 없는 ‘절친’이었지만 촬영이 시작하면 사정이 달라졌다. ‘연애대전’은 남자에게 병적으로 지기 싫어하는 여미란(김옥빈)과 여자를 병적으로 의심하는 남강호(유태오)의 사랑 이야기. 인기 배우인 강호는 동료 여성 배우를 보며 툭하면 투덜댄다. “어차피 돈 많은 놈 잡는 게 목적이면서 일은 왜 하는 거야?” 그는 과거 실연당한 트라우마 때문에 여자라면 딱 질색이다. 업계에 성 소수자라는 소문이 날 정도다. 유태오는 “작가님이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 속 김주원(현빈)을 참고하라고 했다”며 “나는 짱구를 바탕으로 강호를 만들었다. 짱구가 트라우마를 가진 어른이 되면 어떨까 상상하며 연기했다”고 귀띔했다.
‘키스 명인’ ‘멜로의 신’이라고 불리는 사내가 짱구라니. 둘 사이 공통점이 뭐냐고 묻자 유태오는 손사래를 쳤다. “강호와 짱구가 비슷하다는 뜻은 아니에요. 다만 짱구를 상상하며 연기하면 강호의 발언을 밉지 않게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짱구가 제 감수성과 감정을 보호하는 장치였던 셈이에요.” 그는 “순수한 성격은 강호와 비슷하지만 나는 트라우마 때문에 다른 사람을 오해하진 않는다”며 “강호가 미란의 과거 이야기를 듣는 장면에선 유태오의 본능대로 반응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유태오는 “내 무기는 지구력”이라고 믿는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채워지지 않는 감수성의 갈증과 정체성에 관한 혼란이 지구력을 길러줬다”고 돌아봤다. 그는 데뷔 초 한국, 미국, 러시아 등을 오가며 단역과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활동하다가 2019년 개봉한 영화 ‘레토’(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로 뒤늦게 빛을 봤다. 지난 19일(현지시간)엔 주연작 ‘전생’(감독 아리엘 브로이트만)으로 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레드카펫도 밟았다. 말 그대로 금의환향이다. 유태오는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 베를린에 가 영화 ‘화양연화’(감독 왕가위)를 봤다. 그곳에 내가 선다니 믿기지 않는다”며 “신인 시절 내 감수성을 전달할 이야기 하나가 간절했다. 지금은 더 많은 기회가 열렸다. 내 꿈을 현실로 끄집어낼 때”라고 말했다.
“‘로코’는 내게 안 맞는 줄…장르 가리지 않을래요”
여자와 남자는 몸으로 대화한다. 애정행각이 뜨겁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미란과 남강호는 격투를 벌이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김옥빈은 말했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패는 로코(로맨틱 코미디)라니. 희한했어요.” 2005년 영화 ‘여고괴담4 – 목소리’(감독 최익환)로 데뷔한 그는 18년 만에 처음으로 로맨틱 코미디에 도전했다. “로코는 내게 맞지 않는 옷”이라며 밀어내던 그는 30대가 된 후 “내 캐릭터를 너무 한정지었다”는 생각에 도전을 결심했다. 로맨스가 입맛에 맞았던 걸까. 요즘엔 “남자한테 빠져서 전 재산을 탕진하는 여자”를 연기해보고 싶을 정도란다.
김옥빈은 “미란이는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라고 봤다. 온통 남자들뿐인 로펌에서 그는 기죽지 않는다. 밑바닥을 보여주며 의리를 다지는 첫 회식 자리. 미란은 혼자 읊조린다. “너희 남자들이 하는 사회생활. 아부와 공범 의식, 그딴 거 띠꺼워서 안 하지 못 해서 안 하냐.” 김옥빈은 “미란이 ‘여자 변호사’라는 말에 ‘왜 굳이 여자를 붙이냐’고 반응하는 대사 등에 공감했다”며 “할 말 다 하는 캐릭터라 여성 시청자들이 특히 좋아하는 것 같다”고 짚었다. 또, “‘연애대전’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가진 편견을 사랑으로 깨는 이야기”라며 “그 과정이 아름다워서 좋았다”고도 했다.
유태오와 처음 만난 ‘여배우들’에서 김옥빈은 ‘빨리 30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의 나이 23세 때 남긴 말이었다. 30대 중반을 보내는 김옥빈에게 바라던 나이가 되니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답했다. “지금이 정말 좋아요. 20대 땐 삶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불안했거든요. 경험이 쌓인 덕분인지 이젠 여유가 생겼어요. 예전엔 사람들 반응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이젠 제가 남을 챙길 수 있게 됐어요. 앞으로 어떻게 나이 들고 싶으냐고요? 몸 관리 잘해서 액션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배우 양자경처럼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