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가방 무게에 짓눌린 듯 잔뜩 풀이 죽은 소년이 노래한다. “뭐라 설명할 수 없어/ 말로는 부족해/ 나도 모를 이상한 느낌.” 광부인 아버지는 소년에게 남성성을 가지라 강요하지만, 소년은 발레를 사랑한다. 춤을 출 때면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기분이다. 소년은 목청을 높인다. “난 갑자기 하늘을 날기 시작해/ 그 짜릿한 전율/ 나를 태우는 내 안의 자유.”
13년 전 노래 ‘일렉트리시티’(Electricity)에 맞춰 발레를 추던 소년들이 영국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로 통했다. 주인공은 배우 이지명·박준형·이성훈.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한국 초연 공연에서 각각 빌리(이지명·박준형)와 그의 단짝 마이클(이성훈)을 연기했던 세 사람은 최근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이하 웨스트)와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이하 셰인럽)로 관객을 만나고 있다. 발레복을 벗고 고전으로 갈아입은 세 배우를 지난 16일 서울 흥인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무대서 되살아난 ‘로미오와 줄리엣’, 고전에 빠져볼까
‘웨스트’와 ‘셰인럽’ 모두 셰익스피어의 걸작 소설 ‘로미오와 줄리엣’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웨스트’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 사랑을 1950년대 미국 맨해튼으로 옮겨왔다. 두 이민자 집단 제트와 샤크, 그 사이에서 남몰래 마음을 나누는 토니와 마리아를 통해 사랑과 용서의 가치를 역설한다. 이지명과 박준형은 샤크 멤버인 치노와 인디오를 각각 맡았다. 푸에르토리코 출신 혈기왕성한 청년들이다.
“오디션 때 깜짝 놀랐어요. 우리나라에 춤 잘 추는 배우가 이렇게 많다니!” 이지명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는 “다리가 풀릴 정도로 몰입해서 오디션을 봤다. 즐겁고 행복했다”고 돌아봤다. 이렇게 따낸 역할이 쑥맥 치노. 작품에서 춤을 자주 추진 않지만, 이지명은 “한 번 나오는 춤 장면에 모든 걸 쏟아낸다”고 했다. 자타공인 춤꾼이 ‘몸치’ 역할에 캐스팅된 비밀은 뭘까. 박준형이 대신 설명했다. “이미지에 맞는 배역을 맡기셨어요. 치노는 아시아계 푸에르토리코인이라는 설정이에요. 제가 맡은 인디오는 아메리카 원주민 혈통이래요. (연출가인) 훌리오 몽헤 선생님이 연구를 많이 하셨더라고요. 하하.”
‘웨스트’는 작곡가 레너드 번스타인과 스티븐 손드하임, 안무가 제롬 로빈스 등 ‘브로드웨이 전설’들이 뭉쳐 만든 작품이다. 박준형은 “50년이 지나도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것이 ‘웨스트’의 매력”이라고 했다. 특히 “모든 동작에 연출의 의도가 담겼다”(박준형)고 할 정도로 안무에 힘을 실었다. 제트와 샤크가 춤으로 맞붙는 첫 장면은 맨해튼 서부지역에서 며칠 동안 벌어진 일을 함축했다고 한다. 폴란드 이민 2세 제트와 푸에르토리코 출신 샤크는 추는 춤도 다르다. 이지명은 “제트는 발산하고 터뜨리는 춤을 춘다. 샤크의 안무는 응축해서 한 곳을 찌르는 느낌”이라고 귀띔했다.
탭 댄스 내려놓고 연극 데뷔…“몸이 근질거려요”
70년 전 미국으로 돌아간 두 배우와 달리, 이성훈은 1500년대 영국으로 날아갔다. 셰익스피어의 젊은 시절을 그린 ‘셰인럽’을 통해서다. ‘빌리 엘리어트’로 무대 연기를 시작해 뮤지컬과 탭 댄스 공연을 오가며 활동한 젊은 배우는 ‘셰인럽’으로 연극 데뷔 신고식을 치렀다. 이성훈은 “연기력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 연극에 도전했다”면서 “아름다운 대사와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셰인럽’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작품은 1999년 개봉한 동명 영화(감독 존 매든 감독)를 각색했다. 한국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배우 김유정의 연극 데뷔작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이성훈이 맡은 역할은 존 웹스터. ‘백마’ ‘몰피 공작부인’ 등 어둡고 피폐한 비극을 주로 써낸 인물이다. 연극에선 극작가로 이름을 날리기 전 셰익스피어 연극에 출연하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배우 지망생으로 나온다. 이성훈은 “존 웹스터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버려지는 캐릭터”라며 “다른 배우들과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이 거의 없어서 외롭지만, 뻔뻔하게 연기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셰인럽’에서 반전의 열쇠를 쥐었다. 코믹하고 사랑스러운 작품에 순식간에 위기를 몰고 온다. “누구보다 연기와 연극을 사랑하지만, 표현 방식이 뒤틀린 인물”이라는 설명이다.
한때 탭 슈즈를 신고 전국을 누비던 청년은 ‘셰인럽’에서 주특기인 춤을 내려놨다. 이성훈은 “춤을 추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지만, 처음 하는 연극이 재밌다”며 웃었다. 그는 커튼콜에서 한풀이하듯 탭 댄스 동작을 짧게 선보인다. TV 등 매체 진출에도 관심이 많다. 지난해 SBS 드라마 ‘오늘의 웹툰’에 출연했고 MBN ‘불타는 트롯맨’에도 도전했다. 이성훈은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순호, ‘하데스타운’의 오르페우스 역할도 연기해보고 싶다”며 “노래·연기·춤에 모두 능하고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는 배우로 성장하고 싶다”고 소망했다.
“선물 같았던 ‘빌리 엘리어트’, 책임감 커졌어요”
“공연장이 놀이터 같았다”(이지명)던 세 소년은 강산이 바뀌는 시간 동안 박수의 무게를 아는 배우로 성장했다. 셋 중 맏형인 이지명은 암 환우들이 ‘빌리 엘리어트’를 단체 관람한 날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제 또래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공연 후 만난 관객들이 ‘희망을 얻었다’ ‘꿈이 생겼다’는 얘기를 해주더군요. 공연을 통해 꿈과 사랑, 살아갈 이유를 줄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책임감이 더욱 커졌습니다.” 박준형과 이성훈에게도 ‘빌리 엘리어트’는 소중하다.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연기”(이성훈)하며 “난생 처음 팬이 생기는 경험”(박준형)을 해서다. ‘1대 빌리’ ‘1대 마이클’이란 꼬리표가 부담스럽게 느껴진 때도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이지명은 “그때를 멋진 추억이자 나만의 무기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고 각오를 다졌다. 박준형은 “몸과 마음이 건강한 배우로 오래오래 무대에 서고 싶다”고 바랐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