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연달아 치러진 해. 신수 훤한 남자가 우렁차게 외친다. “저는 비록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한 거짓과 불의에도 타협하지 않고, 언제나 약한 사람들 편에 서는 정의로운 정치인이 되겠습니다!” 알맹이는 없고 기세만 등등한 것이 한눈에 봐도 좋은 정치인이 될 깜냥은 아니다.
영화 ‘대외비’(감독 이원태)는 돈과 권력, 명예를 향한 욕망이 엉키고 설켜 끝내 폭발하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만년 국회의원 후보 전해웅(조진웅). 부산 해운대구에서 대한민주당 소속으로 국회의원 출마를 앞둔 그는 “이 동네에선 공천 이꼬르(Equal·=) 당선”이라며 의기양양하다. 그런데 웬걸. 자신도 모르는 새 ‘선수 교체’가 이뤄진다. 정치판 숨은 실세 권순태(이성민)의 계략이다.
작품은 해웅과 순태의 힘겨루기로 흘러간다. 해웅은 해운대구 재개발 계획을 담은 비밀문서를 미끼 삼아 조직폭력배 김필도(김무열)를 끌어들인다. 순태는 돈과 힘을 써서 해웅을 압박한다. 둘의 줄다리기는 의외로 팽팽하다. 해웅은 위기에 몰릴 때마다 악바리처럼 살아남아 순태에게 반격을 가한다. 영화 ‘악인전’ 등 악과 악의 대결을 자주 다룬 이원태 감독은 ‘대외비’에서 최악과 차악 사이 경계를 흐리며 세 사람의 욕망을 조소한다.
순태는 말한다. “정치는 악마와 거래하는 것”이며 “권력을 쥐려면 영혼을 팔아야 한다”고. 대사가 암시하듯 ‘대외비’는 비정하고 비장하다. 다만 서사가 분위기에 짓눌려 부대끼는 순간이 자주 온다. 세 캐릭터의 욕망이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허공에 붕 뜬 탓이다. 해웅과 순태, 필도 모두 배수진을 치고 부딪치는데, 이들이 왜 그렇게까지 이를 악무는지가 와닿지 않는다. 부패한 기득권의 결탁을 비릿하게 그려낸 영화 ‘내부자들’(감독 우민호), 악의 얼굴을 신랄하게 표현한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감독 윤종빈) 등과 비교하면 아쉬움이 더욱 크다.
작품은 시작 전 ‘실제 사건과 무관한 허구의 이야기’라는 자막을 띄우지만,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제14대 총선 당시 불거진 부정 선거 의혹이나 故 노태우 정권 시절 벌어진 수서지구 택지 특혜분양 사건 등이 절로 떠오른다. 어쩌면 현실이 영화를 뛰어넘는다는 점이 ‘대외비’의 가장 큰 약점일 수 있겠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악랄한 권력의 이면과 집요한 욕망이 영화보다 더 극적이라서다. 배우 이성민, 조진웅, 김무열 등이 열연을 펼치지만, 작품은 매혹적인 허구와 날카로운 현실 고발 사이를 애매하게 오가다가 막을 내린다. 상영시간 116분. 1일 개봉.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