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말 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정작 필요한 예산 증액이 뒤따르지 않은 탓이다.
정부는 마약중독 치료 지정병원에 대한 올해 예산을 동결했다. 이는 4억 원 규모로, 늘어나는 마약중독 환자들을 치료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예산이다. 기획재정부는 건전재정 기조 아래 사전 예방, 즉 마약사범 단속에 투자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모양새다. 그러나 전문가는 재범률이 높은 마약범죄 특성상 중독자들을 계속 방치하다간 환자 규모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치료보호기관 21곳 중 13곳 “마약환자 안 받아요”
쿠키뉴스가 9일 보건복지부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2022년 마약류 중독 치료보호기관 21곳 중 13곳(61.9%)은 환자를 단 1명도 받지 않았다. 5곳은 치료 대상이 연간 1~2명에 불과했다.
병원 2곳이 마약중독 치료를 도맡고 있는 실정이다. 2022년 21개 기관에서 치료를 받은 마약류 중독 환자는 총 421명인데, 이 중 참사랑병원(276명), 국립부곡병원(134명)이 전체 환자의 97.3%를 치료했다. 대구의료원은 연간 4명의 환자를 받았다.
21개 기관의 마약 치료 병상은 총 314개지만, 유명무실하다. 84개 병상을 보유한 울산 마더스병원, 25개 병상을 보유한 서울특별시립은평병원은 지난해 1명의 환자도 받지 않았다.
재범률이 35% 이상인 마약 범죄의 특성상 치료·재활 단계가 중요함에도 이를 뒷받침할 인프라는 열악한 게 현실이다.
국립부곡병원은 약물중독치료센터 소장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며 수장 공백 상태가 됐다. 국립부곡병원 관계자는 “장옥진 소장이 해운대 백병원으로 자리를 옮기며 면직 처리됐다. 누가 소장 업무를 맡을지 조율하고 있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며 “중독 치료가 중단된 건 아니다. 치료는 계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인천 참사랑병원에서는 마약류 중독 입원치료를 받기 위해선 2~3달 대기해야 한다. 천영훈 참사랑병원 원장은 “대부분 민간병원들은 전문의가 없고, 병실도 없어 마약환자를 받지 못한다. 민간병원은 마약중독 환자를 보면 손해를 보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이어 “병동에 마약환자가 있다고 하면 우울증, 알코올 중독 환자들이 다 퇴원해버린다. 마약류에 대한 급성기 중독 상태가 되면 아주 심한 조현병 증상과 함께 공격성·충동성이 심해진다. 칼을 들고 위협도 가한다”고 밝혔다.
수가 가산이나 별도의 지원 제도가 없으니 병원에서 마약 중독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도 설명했다. 천 원장은 “지금 같은 상황에선 민간병원들이 마약 환자를 볼 이유가 없다. 마약 환자 치료에 투입되는 자원, 노력 등이 많은데 이에 상응하는 보상체계가 없다. 마약 환자를 받는다고 수가를 올려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마약류 중독 환자들이 치료 사각지대에 놓인 모습이다. 대검찰청의 마약류 월간 동향에 따르면 2022년 한 해 마약 사범은 총 1만8395명에 달한다. 마약 범죄 특성상 암수율(검거 대비 실제 발생범죄 비율)이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수의 환자들이 마약 중독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전재정 기조로 예산 동결… “사전 단속에 더 중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10월24일 “마약과의 전쟁이 절실하다”며 특단의 대책을 주문했다. 여당도 이에 발맞춰 이틀 뒤인 26일 ‘마약류 관리 종합대책 관련 당정협의회’를 열고 마약 관리 컨트롤타워를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당정협의 후 “전문 치료보호기관과 재활지원기관 인프라를 확충해 교정시설 출소 후에도 중독 치료해 일상 복귀를 지원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2023년 정부 예산안에 복지부가 요청한 전문 치료보호기관에 대한 예산 증액안은 반영되지 않았다. 금년도 정부 예산안에는 마약류 중독자 치료 보호 사업에 대해 4억1000만 원이 편성됐다. 이는 2022년 예산과 동일한 수준이다. 마약류 중독 환자 1명이 1개월간 입원할 때 필요한 치료 비용은 최소 500만 원이다.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하는 예산을 더해도 8억2000만 원이 전부다. 한달 간 마약류 중독환자 164명이 입원치료를 받으면 1년 예산이 소진되는 셈이다.
복지부는 당초 증액을 강하게 요구했다. 중독자 치료 비용 19억 원, 치료보호기관에 대한 인센티브 비용 9억 원을 합해 총 28억 원으로 늘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를 기재부가 받아들이지 않아 예산이 동결됐다.
복지부 관계자는 “마약류 치료보호기관이 활성화되지 않은 것은 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마약류 치료가 어려운데 수가도 높지 않고, 마약 환자 치료를 한다고 특별한 이익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올해 예산안 증액을 통해 마약류 치료보호기관에 인센티브를 제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예산이 반영되지 않아 재정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털어놨다.
이어 “다만 치료보호기관에서 의료진 마약류 치료 경험이 없어 접근이 어려운 부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신건강 전문의 자격이 있는 분들 중 민간학회의 도움을 받아 교육을 진행하려 한다”면서도 “교육을 한다고 해도 인센티브가 없으니 참여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기획재정부는 건전 재정 기조 하에 사후 관리 보다는 사전 예방에 중점을 두다 보니 증액안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2023년도 정부안을 심사하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에서 이 사안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진 않았다”며 “재정건전 기조 하에 사전 예방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해 예산을 편성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복지부는 현재 정부와 지자체가 절반씩 부담하고 있는 마약류 중독자 치료보호 지정병원 지원액에 대해 국비 비율을 80~90%로 늘리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기재부는 절반씩 부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맞섰다.
기재부 관계자는 “지자체도 부담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예결위 위원들이 납득한 모양”이라며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중독재활센터 관련 예산은 늘렸다. 이 사안도 내년도 예산 편성 과정에서 관심을 갖고 살펴보겠다”고 했다.
이범진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마약퇴치연구소장(아주대 약학대학 교수)은 “마약사범이 1만8000명이지만, 숨어있는 사람을 추정해보면 100만 명까지도 보고 있다”면서 “마약사범의 재범 비율이 굉장히 높은데, 이들을 치료하지 않으면 마약 중독자는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마약 중독자 중엔 마약 피해자들도 있기 때문에 이들을 범죄자라며 단죄하고 방치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 소장은 “쾌락에 의해 자신을 망가뜨린 마약사범도 있겠지만 악행에 의한 피해자일 확률도 높다”며 “약을 끊으면 정상적 생활이 가능한 경우가 많다. 이들을 내버려두기 보단 치료·재활을 통해 사회 구성원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소장은 “이제는 치료에 예산을 투자해야 할 때”라며 “영국, 미국, 태국 등 여러 나라들은 UN 권고에 따라 치료·재활에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치료 부분에 ‘0’에 가까운 예산을 책정하고 있다. 마약 중독으로 인한 사고 등 여러 가지로 발생하는 간접비용을 고려할 때 치료에 투자해 건전한 사회로 가는 길 또한 국가의 이득이 된다는 점을 정부가 국민에게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피력했다.
김은빈 기자 eunbeen1123@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