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게나 기른 기름진 머리카락, 몸 곳곳에 새긴 문신,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채 거드름 피우는 몸짓….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 속 손명오(김건우)는 한눈에 봐도 불량스럽다. 박연진(임지연)이 돈과 힘으로 존엄을 짓밟아 소름 돋는다면, 손명오는 도덕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야만인 같아 징그럽다. 이런 손명오를 연기한 배우 김건우는 의외로 유쾌했다. “그렇게 무섭나요, 명오가?” 지난 23일 서울 소공동 카페에서 기자들을 만나 이렇게 묻는 그에게선 예상치 못한 순수함이 묻어났다.
김건우가 손명오를 만난 건 약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은숙 작가 신작’이라는 정보만 들고 도착한 오디션에서 김건우는 손명오로 낙점됐다. 김 작가는 오디션 영상에서 김건우를 보자마자 ‘이 친구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송혜교 등 대선배를 맞닥뜨리게 된 새내기 배우는 캐릭터 연구에 열을 올렸다. “실제로 존재할 법한, 생물 같은 캐릭터를 만들자”며 악동으로 유명한 이종격투기 선수 네이트 디아즈를 파고들었다. “초점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인물의 질감”을 자기 옷으로 소화하는 과정이었다. ‘명오가 날씬한 체형이면 좋겠다’는 제작진 제안에 몸무게도 3㎏ 감량했다.
이렇게 탄생한 손명오는 악의 대명사로 불렸다. “이제부터 네가 ‘고데기’ 열 체크 좀 해줄래?” 박연진이 이렇게 말하자 행동대장 손명오는 기다렸다는 듯 잔뜩 달궈진 미용기구로 문동은(송혜교)의 피부를 지진다. 어른이 돼 문동은과 재회했을 때도 “나는 죄가 없는데”라고 시침을 뗀다. 김건우는 “명오는 잘잘못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봤다. “명오는 부모 없이 자라 어느 길로든 빠질 수 있었어요. 오로지 생존을 위해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까요. 대본을 읽을 때도 명오가 무섭다는 인상은 크지 않았어요. 오히려 동은의 계획에 너무 쉽게 말려들어서 바보 같다고 생각했죠.(웃음)”
작품이 3주 연속 넷플릭스 비영어권 TV 시리즈 시청시간 1위를 기록하는 등 화제를 모으면서 김건우도 스타덤에 올랐다. 오죽하면 “김건우가 ‘더 글로리’ 공개 전 SNS를 준비한 게 스타가 될 준비를 하는 모양”(임지연)이라는 농담까지 나왔을까. 김건우는 “거리에서 저를 알아보거나 사인·사진을 요청하는 분들이 많아졌다. 식당에서 서비스도 많이 받는다”며 웃었다. 심지어 SNS 댓글로 공개 구혼하는 외국인 팬까지 생겼단다. 하지만 김건우는 쉽게 들뜨지 않았다. “한동안 손명오로 불릴 각오가 됐다”면서도 “이 거품도 언젠가는 빠질 테니 나는 내 일에 충실하면 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차기작으로 오는 5월 개막하는 뮤지컬 ‘빠리빵집’을 택한 것 역시 이런 강단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결정이다. 김건우는 “무대를 향한 동경이 있다”며 “학교에서 공연했을 당시 관객과 호흡을 나누며 살아있는 기분을 느꼈다”고 했다. 입시를 코앞에 둔 19세 때 친구를 따라서 연기학원에 갔다가 배우를 꿈꾸기 시작했다는 그는 “연기는 어렵고 그래서 더 재밌다”고 말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연극원 전체 수석으로 입학한 ‘연기 천재’는 자신감과 겸손함을 황금비율로 지니고 있었다. 시청률 등락을 몸소 겪고, 관심과 무관심 사이를 줄타기하며 새긴 배우의 속근육이 엿보였다.
“‘더 글로리’를 만나기 전, 오디션에서 거듭 떨어져 슬럼프를 겪었어요. 하지만 저를 믿었어요. ‘난 슈퍼스타가 될 거야’라는 믿음은 아니었고요, 나도 어딘가엔 쓰임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연기를 무척 사랑하거든요. 연기가 주는 스트레스도 물론 있어요. 죽을 때까지 연기에 통달하지 못하겠다 싶을 만큼 어렵기도 하고요. 하지만 돌아보면 그런 시간이 저를 성장시켰어요. 더 보여주고 싶은 모습, 보여줘야 할 모습이 아직 많이 남았어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