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평호(50) 연구원은 국립재활원에서 장애인 접근성 향상을 위한 보조기기를 만든다. 그는 자연분만 과정에서 뇌세포가 손상돼 뇌성마비 진단을 받은 중증 장애인이다. 주위 도움과 휠체어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
학교에 다니지 않아 대부분을 집 안에만 머물렀던 어린 시절의 이 연구원에게, TV 속 세상은 삶의 전부였다. 그는 TV를 보면서 언젠가는 비장애인들과 어울려 살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다. 지난 10일 만난 이 연구원은 “다큐멘터리와 교육 방송으로 일반 상식을 배웠다”며 “TV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고 회상했다.
보조기기에 의지해 일상의 불편을 조금이나마 해소한 경험이 그를 개발자의 길로 이끌었다.
이 연구원은 “부모님이 일을 가시고 동생들이 학교에 가면 혼자 집에 있어야 했다. 그때 가장 어려웠던 것이 배변 문제였는데, 집에 있는 진공청소기와 빈 유리병을 이용해 ‘소변 처리기’를 만든 뒤 더욱 다양한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이전에는 배변을 참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보조기기가 장애인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애인들은 무엇인가를 스스로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 더 많은 선택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들을 돕기 위해 보조기기 개발의 꿈을 키웠다”고 덧붙였다.
이 연구원은 검정고시를 통해 나사렛 대학교 재활공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이후에는 석사 과정 이상부터 지원 가능한 국립재활원에 지원하기 위해 순천향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연구원은 “어린 시절부터 ‘넌 장애인이라 안 돼’, ‘하지마’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검정고시를 준비한다고 했을 때도 동생이 ‘형은 수학과 국어를 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만약 그 말을 듣고 포기했다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라며 웃었다.
이 연구원은 좋은 보조기기가 있다면, 장애인들이 콤플렉스를 해소하고 더 나은 삶을 영유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게임 접근성을 높이는 보조기기는 그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장애인들이 게임을 통해 능동적으로 생활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연구원은 “(장애인들에게) 게임 보조기기는 무언가를 경험하고 도전할 수 있는 첫 단추가 될 수 있다. 장애인도 디지털 문화를 즐기고 향유하고, 느끼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여가 문화를 즐기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다. 사회생활에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설명했다.
국립재활원은 지난 2021년 1월부터 9월까지 ‘같이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같이게임, 가치게임은 뇌병변장애인이 게임을 할 수 있도록 장애인과 장애인 가족이 전문가들과 함께 적합한 게임을 찾고, 게임 보조 기기를 함께 개발한 자조모임이다. 국립재활원은 자조모임을 통해 장애인을 위해 10종의 기기를 새롭게 개발하고 기성품 2종을 개조해 성능을 향상시켰다. 또한,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안내서 ‘누구나 게임을 할 수 있다’를 발간했다.
이 연구원은 해당 프로젝트에서 중증 장애 게임 이용자를 위한 게임 접근성 기기 개발에 참여해 ‘게임접근성 컨트롤러’, ‘스위치 거치대’, ‘게임 컨트롤러 잡기 보조밴드’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중 게임 접근성 컨트롤러는 이 연구원이 개발 단계에서 많은 공을 기울인 작품이다. 터보 버튼 및 각종 기능키를 상단에 배치해 장애인 이용 과정에서의 편의성을 높였다. 양옆에 부착된 조이스틱은 원활하게 손을 구부릴 수 없는 장애인을 위해 맞춤형으로 제작됐으며, 장애인의 기능수준을 고려해 탈부착이 가능한 형태로 만들었다.
이 연구원은 “뇌병변 장애인은 손목이 완전히 변형돼 있어 일반 컨트롤러를 사용할 수 없다”며 “이를 고려해 조이스틱을 Y자 형태로 개조했다. 몸 신체 변형자가 사용할 수 있는 기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 연구원이 자조모임에서 개발한 기기들은 장애인들에게 즐거움을 줬을 뿐만 아니라, 장애인 가족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가족들이 함께할 수 있는 새로운 놀이 문화가 생기며 가족 간의 유대관계도 좋아졌다. 자조모임에 참가했던 뇌병변 장애인 이충현(23)군의 어머니 박은경(52)씨는 쿠키뉴스에 “아이가 즐거우니 가족도 즐거워졌다. 가족 간 공감대가 형성됐다. 토론을 할 수 있는 요소도 생겼다”며 “단순한 운동 효과뿐만 아니라 충현이에게 게임은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이자, 자존감을 높이는 도구”라고 소회를 전했다.
이 연구원은 장애인 게임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사회 각계의 노력이 앞으로도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애인 게이머를 위한 게임 개발 가이드라인, 전용 보조기기 등의 제작 및 개발이 활발한 해외와 달리 국내에선 색약모드를 지원하는 게임도 손에 꼽을 정도다. 한국콘텐츠진흥원(콘진원)이 발표한 ‘2022 게임 이용자 실태조사’에는 장애인의 게임 이용 현황과 관련된 연구나 조사항목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 연구원은 “국내 게임 콘텐츠는 하드웨어 취약자(노인, 장애인, 다양한 연련층)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한국의 PC와 모바일 게임은 게임 자체에 보안이 걸려 있어 장애인 보조 기기로 이용할 수 없다. 국내 게임을 장애인이 이용하기 위해서는 게임의 접근성이 향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원은 부족한 장애인 게임 접근성은 더 이상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라고도 강조했다. 기존 게임 이용자들이 고령화되면서 자연스레 장애 인구도 늘어나는 상황이다. 더 많은 이용자층을 목표로 하는 게임사로선 장애인 접근성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닌텐도의 ‘마리오 카트’는 난이도를 설정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이용자는 세부설정을 통해 자신의 ‘카트’가 벽에 부딪히지 않게 만들거나, ‘방향키’만으로 운전이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이는 아이들과 고령층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기능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중증 장애인도 이용할 수 있게 됐다”며 비장애인 취약 계층과 장애인의 거리가 결코 멀지 않다고 지적했다. 접근성 문제에서 해결하기 가장 어려운 지점에 있다고 평가되는 장애인 게임 접근성 문제를 극복한다면, 자연스레 다른 부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접근성 문제도 사라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연구원은 게임 개발 과정에 더 많은 장애인이 참여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비장애인이 만든 보조 기기는 장애인이 쓰기에 2% 부족하다고 설명하면서 “물건을 사용하는 입장에서 ‘감성’이 다르다. 보조 기기는 디테일한 부분에서 판도가 갈린다. 완성도를 높여야 장애인에게 필요한 보조 기기를 만들 수 있다”고 첨언했다. 이 연구원은 “(개발할 때) 나를 위한 물건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난 장애인이면서 연구자다. 이러한 입장에서 의견을 내면 사회에서 같은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 연구원은 앞으로도 게임을 비롯한 장애인 접근성 기기 개발에 몰두할 계획이다. 그는 “나와 같은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싶다. 장애인이 혼자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보조기기를 통해서 할 수 있게 됐다고 들었을 때, 이를 계기로 다른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이 연구원은 “이전에는 장애에 대한 트라우마, 콤플렉스, 열등감이 있었다. 장애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회적인 차별과 억압을 받았고, 공교육도 받지 못했다고 느꼈다. 누군가 무시한다고 여겨지면 화도 났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 지금은 사회적으로 역할이 있고 누군가를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느껴진다. 자체적으로 치유가 되고 존재성을 찾아가고 있다. 장애인들을 위한 보조기기를 개발하며 장애에서 기인한 콤플렉스와 소외감이 해소됐다”고 말했다.
이어 “언젠가는 장애인들이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보조기기를 실시간으로 만들고 공급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 싶다. 이를 위해서는 보조기기 기술이 축적되고 서비스가 갖춰지는 것이 중요하다. 장애인들이 필요한 것을 요구하면 실시간으로 보조기기를 제공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성기훈, 문대찬 기자 misha@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