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이라 멍때릴 시간이 부족해서 신청했어요. 그동안 못 때린 멍, 오늘 다 때리겠습니다.” (김란·32‧여‧직장인)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이기는 대회. 21일 오후 4시 한강 잠수교 인근에서 서울시가 주최하는 ‘한강 멍때리기 대회’가 열렸다.
올해 6회째인 이 대회는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게 있는 것이 규칙이다. 참가자들의 심박수를 15분마다 확인해 90분 동안 가장 안정적인 심박수를 기록한 사람이 우승한다. 그 흔한 우승 상품도 없지만, 총 3160명이 지원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45대 1 경쟁률을 뚫은 70팀이 이날 흐리고 바람 부는 잠수교에 모여 번호표를 받았다.
옷차림부터 달랐다. 잠옷을 입고 온 참가자부터 3색 가발을 쓰거나 바나나 코스프레를 한 참가자도 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구경하는 시민들도 많았다. 현장에선 즉석 참가 문의가 쇄도했다. 박창현(22‧남‧대학생)씨는 “멍때리기 대회를 처음 본다”며 “만약 대회가 또 열린다면 참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의 직업도 다양했다. 이날 15번 번호표를 달고 대회에 참가한 방송인 강남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멍때리기를 연습해왔다”며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 출전하게 됐다”고 밝혔다. 1회 우승자인 가수 크러쉬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크러쉬를 보며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며 “우승해서 크러쉬와 대결해보고 싶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강민석(30‧남‧영등포소방서 소방공무원)씨는 멍때리기 대회 최초 소방공무원 참가자다. 그는 “최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바람도 쐴 겸 나왔다”며 “오늘을 위해 그동안 멍을 때리지 않고 모아놨다”고 각오를 밝혔다. 이어 “입상은 바라지 않는다”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가겠다”고 말했다.
외국인 참가자도 있었다. 메리크 조슈아씨는 “2년 전 처음 멍때리기 대회를 알고 참가를 희망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돼 아쉬웠다”며 “배우 직업을 상징하는 슬레이트 소품을 준비하는 등 오늘을 기다렸다”고 밝혔다.
캐릭터도 멍때리기 대회에 뛰어들었다. 지난해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롯데홈쇼핑 캐릭터 벨리곰이 그 주인공이다. 참가번호 68번을 받은 벨리곰이 대회장에 등장하자, 시민들이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오후 4시20분. 대회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정적이 찾아왔다. 시작 전 체조를 마친 참가자들은 빠르게 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웅성거리던 시민들도 함께 조용해졌다. 잠수교 옆 한강에 제트스키가 소음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참가자들은 미동 없었다.
대회는 치열했다. 1시간 동안 탈락자가 한 명도 안 나왔다. 탈락자가 발생하지 않자 주최 측에서 분수쇼를 약 20분간 진행하며 방해했지만, 경고자만 3명 발생했을 뿐 탈락자는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잠수교엔 거센 바람이 불었다. 참가자들은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주최 측은 대회 중 참가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음료, 마사지, 등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색깔별로 준 카드를 들면 마사지(빨강), 음료(파랑), 부채질(노랑), 불편사항 해소(검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식이다. 하지만 약 90분 동안 2명의 참가자만 음료 서비스를 신청했을 정도로 이용률이 저조했다. 행사 관계자가 “서비스를 이용해도 된다”며 “집에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용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멍때리느라 바쁜 참가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회장 한 편에선 참가자들이 적은 참가 포부를 두고 시민들의 인기 투표가 벌어졌다. 인기 투표는 심박수와 함께 우승자를 선정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8번 참가자가 적은 “챗GPT가 제 직업을 대체할 것 같아서 뭐 해 먹고 살지 고민하러 왔어요”, 49번 참가자의 “시험 기간에 때릴 멍 미리 청산하러 옴”이 많은 표를 받았다. 67번 참가자의 “그냥”, 68번 참가자의 “맑눈광(맑은 눈의 광인)의 끝을 보여줄게”도 인기가 많았다. 한 표를 행사한 신모(23‧여)씨는 “2번은 멍때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49번 참가자는 포부에 공감이 가서 투표했다”고 선정 기준을 설명했다.
1시간10분 만에 첫 탈락자가 나왔다. 김기범(24‧남‧DJ)씨는 “멍을 잘 때리고 있었는데 탈락자로 지목돼 당황스럽다”며 “재밌고 쉬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고 탈락 소감을 밝혔다, 첫 탈락자가 나온 뒤 곧바로 탈락자 1명과 기권자 1명이 발생했다. 이어 벨리곰이 탈락하자 일부 시민들이 야유를 보내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대회는 1시간30분이 지난 오후 5시50분 종료됐다. 살아남은 참가자들을 축하하는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높은 예술점수와 안정적인 심박수 그래프를 나타낸 특별상을 취재하러 온 현직 기자가 받아 눈길을 끌었다. 올해 우승 트로피는 43번 참가자 정성인(32‧남‧배우)씨에게 돌아갔다. 검은 턱시도를 입고 나타난 정씨는 “1등을 할 거라고 전혀 생각 못 했다. 어안이 벙벙하다”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서 생각을 비우려 참가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멍때리기 대회는 시민들 각자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갔다. 지난해 우승자인 한화 이글스 팬 김명섭씨는 “멍때리기 대회 우승 후 인생 달라졌다”며 “예능 섭외가 들어오기도 하고, 회사에서 일하는 중 멍때린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고 밝혔다. 이날 우승한 정성인씨는 “멍때리기는 뇌를 비우는 데 효과적”이라고 소개했다. 이날 멍때리기 대회를 구경하던 이승석(72‧남)씨는 “참가자들이 매우 편해보인다”며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 내려놓고 충전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나. 꼭 필요한 대회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