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작품이 배우를 위로한다. 배우 이해준에게 뮤지컬 ‘모차르트!’가 그렇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음악가로 불리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연기하면서 이해준은 “내 과거 상처가 해소되는 기분”이라고 했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지난 10일 서울 도곡동 EMK뮤지컬컴퍼니 사무실에서 만난 이해준이 들려준 얘기는 이랬다. “극 중 볼프강과 아버지 관계가 저와 비슷했어요. 제 아버지도 제가 연기하는 것을 반대하셨거든요.” 작품에서 볼프강의 아버지는 아들을 천재 음악가로 키워냈으나 아들의 음악 세계를 좌지우지하려 든다. 볼프강은 아버지 뜻을 거슬러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지만,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결핍에 마음이 병든다.
이해준은 지난해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청년의 마음은 넘버 ‘왜 날 사랑하지 않나요’에 절절히 녹아들었다. 이해준은 “가사가 깊이 와닿는 노래”라며 “관객들도 이 곡을 좋아해 주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공연을 봤다면 무슨 말을 했을 거 같으냐고 물었더니 “꿈을 지지해주지 않아 미안하다고 하실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배우의 가슴에 응어리진 멍울은 그렇게 아물고 있었다.
꿈을 외면받은 심정이 비슷해서일까. 이해준은 볼프강에게서 외로움을 봤다.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이용만 당하면서 느끼는 외로움뿐만 아니라, 자신조차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외로움”을 모차르트가 지녔다는 해석이다. 볼프강은 아마데로 대변되는 천재성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지만, 결국 아마데가 자신의 심장을 찔러 그 피로 악보를 쓰게 한다. 이해준은 “누구에게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일은 어렵다”면서도 “관객들이 ‘모차르트!’를 통해 스스로를, 또 행복과 힘듦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용기를 얻길 바란다”고 말했다.
“‘모차르트!’는 천재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한 인간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에 가깝죠. 볼프강은 자신의 재능을 사랑하지도, 인간적인 면을 받아들이지도 못했잖아요. 그래서인지 이번 시즌에 추가된 ‘내 운명, 처음부터 널 이해하고 사랑했다면 우린 더 행복했을까’라는 대사가 마음에 와닿아요. 사실 누구에게든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는 일은 힘들잖아요. 그래도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아요.”
이해준에게 ‘모차르트!’는 꿈의 공연이었다. 그는 7년 전 이 작품을 처음 보고 “나도 해보고 싶은 바람과 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공존했다”고 털어놨다. 노래가 많고 감정의 극단을 오가야 하는 역할이라서다. 그래서 그는 작품에 캐스팅되고도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고 했다. “꿈꿔온 작품을 너무 빨리 만난 것 같아 잠을 못 이뤘어요. 하지만 부담을 내내 안고 있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어차피 부딪쳐야 한다, 노력하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자는 생각으로 부담감을 받아들였어요.”
전작 ‘베토벤’에서 형제로 호흡을 맞춘 배우 박은태와 박효신은 “‘모차르트!’를 끝내고 나면 엄청나게 성장해있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두 사람은 이미 ‘모차르트!’에 한 차례 이상 출연한 경력자다. 이해준은 “처음엔 형들이 ‘축하한다. 그런데 너 큰일 났다’고 하셨다. 형들에게도 정신적으로든 체력적으로든 가장 힘든 작품이었다더라”라며 “하지만 그만큼 무대에서 버티는 힘이 늘 거라고 하셨다. ‘모차르트!’를 해내면 못할 작품이 없을 거라고 자신감을 심어주셨다”고 돌아봤다.
“대학만 졸업하면 무조건 주인공”일 줄 알았던 배우 지망생은 2013년 뮤지컬 ‘웨딩싱어’에서 앙상블 배우로 무대에 첫발을 디뎠다. 대학로 중·소극장에서 경력을 쌓은 세월이 10여년. 그 사이 소속사와 분쟁을 겪으며 연기를 그만둘까 고민도 했다. 긴 시간 이해준을 버티게 한 것은 ‘꿈’이었다. 혼자 꾸는 꿈이 아니었다. 아들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 주인공으로 서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어머니의 꿈과 TV에서 노래하는 손자를 보고 싶다는 할머니의 꿈도 이해준은 어깨에 둘러멨다.
“저는 천재가 아니에요. 노력이 저의 가장 큰 재능일 정도로요. 노력에 배신당한 순간도 많았어요. 하지만 그런 좌절을 이겨낼 만큼 무대가 좋았습니다. 저는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말을 믿어요.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얼마 전 ‘모차르트!’ 모든 시즌을 보셨다는 관객께서 ‘이해준만의 모차르트가 탄생했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가장 행복하고 감사했어요. 마지막 공연까지 저만의 모차르트를 지켜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모차르트!’를 마치고 나면, 뭐든 해낼 수 있으리라는 용기와 자신감이 생길 것 같아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