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지휘'에 간디를 생각하는 남자

아내의 '지휘'에 간디를 생각하는 남자

[지리산웰빙팜] 농사꾼 임송의 귀농일기(33)
아내와 나물 작업...착한 남편은 사람의 도리

기사승인 2023-09-11 09:33:32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나물 작업을 했다. 어제저녁에 마른 취나물 30㎏을 물에 불려놨다가 새벽 6시에 공장에 나가서 작업을 시작했다. 굳이 그렇게 일찍 시작하지 않아도 되는데 요즘 아내의 마음이 바빠서 새벽 작업을 많이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요즘 내 시간은 내 것이 아니다. 보통 아침에 일어나면, 아내에게 “오늘은 뭐 해야돼?”라고 묻는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쫙 늘어놓는다.

그 전날 오늘 내가 할 일을 미리 생각해 놓았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묻는 즉시 막힘없이 술술 얘기가 나올 수 있겠는가.


예전 같으면, “뭐야, 내가 뭐할지를 왜 니가 정해?”라고 했을 텐데, 요즘은 그냥 힘 빼고 산다. 딱히 당장은 돌격 앞으로 할 일도 없고, 그동안 내 멋대로 실컷 해봤으니 지금부터라도 착한 남편 노릇을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다 싶기도 하다. 그렇게 힘 빼고 사니 무엇보다 주변이 조용해서 좋다.

다만 사업이라고 벌여놓고 보니 항상 돈 걱정이 있기는 한데, 그것도 오랜 시간 지속되다 보니 소위 이골이 났다.

요즘은 내가 처한 상황을 그저 담담하게, 마치 유체이탈식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면, ‘아~ 왜 이렇게 판로가 시원하게 뚫리지 않지, 답답하겠구먼’ ‘이번 달 직원들 월급이며 원재료비, 택배비, 금융비용 등을 마련하려면 고생을 좀 하겠구나’ ‘밭에 고구마 잎이 무성한 거 보니 풍년이겠구먼. 고구마 가격이 좀 내리려나’ 등등.

마치 내 일을 남의 일 보듯 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사실 마음이 이렇게 편해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월말이면 돈 마련하느라 전전긍긍했고 때론 잠도 쉽게 들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신경이 예민해져 주변에 화도 내고 다툼도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노심초사한다고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만 나빠졌다. 그래서 내린 결론.
'비폭력 무저항' 정신의 상징 간디. 이미지=임송 제공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내 마음을 바꾸자.”

공무원 초년병 시절, 소위 내 ‘사수’(선임)는 나이도 나보다 일곱 살이나 많았고 공무원 하기 전에 건설회사에 근무한 경력도 있어서 세상 물정에도 밝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꾀가 많아서 주변 사람들을 제 입맛대로 조정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나는 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사람 밑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나를 마치 자기 몸종 부리듯이 했다. 처음에는 맞서보려고 나름 머리도 써보고 화도 내보고 했는데, 이내 나는 그 사람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며칠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 “맞설 수 없다면 상대에게 120%(20%는 덤) 맞춰주자.”

이후 출근하면 그 사람 관점에서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살피기 시작했고, 그가 말하기 전에 움직였다. 가끔은 놓쳐서 핀잔 받은 일도 있었지만 대체로 그 사람이 요구하는 일들을 무리 없이 해냈다.

그러기를 반년 이상 했을 때, 퇴근 후 회사 근처 호프집에서 술이 거나해진 그가 말했다.

“앞으로 너에 관한 일이라면 견마의 지로를 아끼지 않겠다.” 30년이 넘은 일인데 아직도 그 사람이 했던 말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분명히 견마의 지로라고 했다) 인사 담당자였던 그는 이후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켰다.

간디가 주창한 ‘비폭력 운동’의 위대함은, 그 운동을 통해 원하는 바를 쟁취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게 목표라면 굳이 효율 떨어지는 ‘비폭력 운동’ 말고도, 같이 무기를 들고 게릴라전을 편다거나 여론전, 법적 투쟁 등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도 비폭력 운동이 오랜 시간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은, 비폭력 운동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무기 든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무기 든 사람 측으로서는 비무장 군중이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꾸역꾸역 달려든다면 처음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무섭지 않을까.

상대방에게 120% 맞춰주기 역시 내 나름의 비폭력 저항 운동이었다. 나보다 여러모로 뛰어난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으로 비무장,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욕구를 최대한 충족시켜주는 방식으로 대응한 것이다.

그 결과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해피엔딩. 그의 수발을 들면서 자존심 상하지는 않았나? 전혀. 상대방이 두렵다거나 내 안에 삿된 마음이 있어서 한 일이 아니라, 답답한 상황을 타파하는 방편으로 채택한 ‘비폭력 저항’이었으니까.

◇ 임송
중앙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펜(Upenn)대학 대학원에서 사회정책학을 공부했다. 1989~2008년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등에서 공직 생활을 했다. 부이사관으로 퇴직 후 일용직 목수를 거쳐 2010년 지리산(전북 남원시 아영면 갈계리)으로 귀농해 농사를 짓다가 최근 동네에 농산물 가공회사 '웰빙팜'을 설립했다.

jirisanproduce@daum.net
전정희 기자
lakajae@kukinews.com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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