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배우로 데뷔하기 전까지 한소희는 미생이었다. 프랑스 유학 자금을 마련하려 아르바이트를 했다. 호프집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월급으로 180만원을 받았다. 그러다 우연히 광고모델로 발탁됐다. TV 광고 한편으로 번 돈이 2000만원. 유학길을 앞당길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광고를 본 연예기획사 대표의 설득으로 연기를 시작해 시청률 30%에 육박하는 드라마(JTBC ‘부부의 세계’)에 출연하며 톱스타가 됐다. 새로 선보인 넷플릭스 ‘경성크리처’는 4주 연속 넷플릭스 비영어 TV 드라마 시청 수 톱10에 들었다. 그런데도 한소희는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란다. 왜일까.
“(연기를)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제 부스터거든요.” 지난 15일 서울 가회동 한 카페에서 만난 한소희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넷플릭스 시청 순위도 찾아보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작품과 경쟁하는 기분이 싫다”는 이유에서다. ‘경성크리처’가 일본에서 인기라는 말에도 한소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작품 공개 후 SNS에서 “인간을 수단화한 실험 속에 태어난 괴물과 맞서는 찬란하고도 어두웠던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경성크리처’를 소개했다가 ‘악플’ 테러를 당했다. 1940년대 일본이 조선인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벌이다 괴수를 만들었다는 작품 설정이 일부 일본인의 심기를 건드렸다. 강은경 작가는 일본 731부대를 조사해 ‘경성크리처’를 썼다.
한소희는 대담했다. “일본어를 몰라서 악플인 줄도 몰랐다”며 웃었다. “몇몇 일본 팬들은 한국어로 ‘마음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응원해줬는걸요. 전 괜찮아요. 전혀 아프지 않아요.” 작품 모태가 된 731부대의 모성애 실험을 얘기할 땐 표정이 심각해졌다. 모성애와 생존 본능 중 어느 쪽이 더 강한지 알아보려 엄마와 아기를 사지로 내몬 실험이었다. “(실험이 너무 참혹해) ‘자료를 찾아보지 말걸’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다만 제가 느낀 감정을 제 캐릭터 채옥에게 입히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채옥은 식민시대에 이미 익숙했고 무력감도 느끼던 아이니까요.” 한소희가 연기한 윤채옥은 사라진 엄마를 찾아 10년 동안이나 만주와 조선을 헤매는 인물. 그 과정에서 생체실험을 목격하고 일본군에 맞선다. 강 작가는 대본을 쓸 때부터 한소희를 떠올리며 채옥을 만들었다고 한다.
‘경성크리처’를 찍을 땐 액션 연기를 하다가 눈 주변을 다치는 일도 있었다. 한소희는 그날 강 작가에게 ‘속상하다’고 말했다. 다친 게 억울하다는 푸념이 아니었다. 몸을 아끼지 않는 이 열혈배우는 ‘간만에 느낌 왔는데…. 잘할 수 있었는데…’라며 촬영이 중단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작품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흙투성이가 되는 배우”(강 작가) 한소희는 데뷔 초 화려한 외모로 주목받았다. 맡는 역할도 유부남과 외도하는 악역(SBS ‘돈꽃’, ‘부부의 세계’)이 많았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늘 열망이 뜨거운 인물들이었다. 넷플릭스 ‘마이네임’에선 얼굴이 피 칠갑을 하고선 격투 액션을 소화했다.
한소희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성격”이다. 그런 그에게도 두려운 도전은 있었다. “타투를 지우고 연기를 시작한 거예요. 이전까지의 삶을 뒤로하고 새 챕터를 여는 시작이 바로 타투 제거였어요.”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며 그림을 공부하던 그는 연기를 해보란 제안을 받고 한동안 망설였다고 한다. 연기를 배우기는커녕 연기자가 될 거라고 상상도 해본 적 없다고 했다. “내가 잘 해내지 못하면, 이 자리를 위해 수없이 노력해온 사람들의 노고를 짓밟는 셈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큰일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있었고요. 지금도 스스로를 내몰아요. ‘잘해야 해. 못하면 나락이야. 연기도 못 하면서 이 돈(출연료)을 받을 순 없어’라고요.”
다만 한소희는 ‘만인의 이상형’이란 좁고 작은 틀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 데뷔 전부터 운영한 블로그에 여전히 일상적인 글을 올리고, 공백기엔 얼굴에 피어싱도 했다. 이 거리낌 없는 행보는 한소희를 젊은 여성들의 우상으로 만들었다. 한소희는 “팬들이 언제든 떳떳하게 ‘우리 언니 배우예요’라고 말할 수 있게 내 몫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다”며 “적어도 지금까진 벼랑 끝에 잘 매달려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