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필의 視線] 천안의 보물, 백석대 현대시100년관

[조한필의 視線] 천안의 보물, 백석대 현대시100년관

기사승인 2024-03-29 11:28:36
막 장인의 손에서 매어진/ 양모 붓처럼 봉오리를 뽑아 올리던/ 집 앞 목련이/ 하룻 밤 사이/ 날개를 활짝 편 학들을/ 머리 가득히 이고 서 있다.

시조시인 이근배의 ‘빈꽃’이다. 며칠 전 백석대 ‘현대시100년관’에서 마주친 시다. 목련이 앞다퉈 피는 지금, 딱 어울린다.

백석대 한국사 강의 있는 날이 즐겁다. 젊은 학생들 만나는 것도 그렇지만, 현대시100년관서 주옥같은 시를 만나기 때문이다. 강의 시간보다 일찍 가서 이곳에서 행복한 봄날을 만끽하고 있다.

이달 초는 청마 유치환(1908~1967)의 시 ‘그리움’에 빠졌다. 그날 100년관에 들어서면서 조그만 모니터 앞에 얼어붙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파도가 바위를 때리는 화면 배경으로 이 시가 흐르는데, 익히 알던 시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임은 뭍처럼 까딱 않는데... 날 어쩌란 말이냐. 임은 시인이 짝사랑하는 어떤 여인이란 생각이 번뜩 들었다.

백석대 현대시100년관 모니터에 유치환의 시 '그리움'이 올라 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요즘 세상은 너무 편하다. 스마트폰으로 ‘유치환, 그리움’을 검색하니 청마의 러브스토리가 펼쳐졌다.

38세 유치환이 해방직후 통영여중에 국어교사로 근무할 때다. 시조를 쓰는 가정교사 이영도(1916~1978)도 그곳에 있었다. 미모의 30세 그녀는 남편과 사별하고 딸을 혼자 키우고 있었다.

유치환은 편지로 연정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편지는 그가 죽기 전 20년간 지속됐다. 같은 학교에 근무하니 쉽게 얼굴을 볼 수 있지만, 편지는 그들의 플라토닉 러브에 낭만을 더했다.

그런데 둘이 만나기로 한 날, 갑작스런 예총모임으로 못 만나자 유치환이 안타까움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날 그는 버스에 치어 불귀의 객이 됐다. 이영도는 그 슬픔을 미국의 딸에게 편지로 ‘그이가 죽었다. 그이가 죽었다’고 알렸다. 그녀는 그가 보낸 편지 200통을 추려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를 펴냈다. 책 제목은 청마의 시 구절이다.

당시 청마는 유부남이었다. 이영도의 시조 구절에 어색한 만남이 드러난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유치환은 통영여중 교사로 같이 근무하던 이영도 시조시인(사진)에게 20년간 연정의 편지를 보냈다.

나는 전국에 뽐낼 만한 천안의 문화명소로 주저 없이 아라리오갤러리와 현대시100년관을 꼽는다. 특히 현대시100년관은 관람객을 옛 추억에 빠져들게 하는 곳이다. 국어교과서나 젊은 시절 여러 고민에 빠져 접했던 시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신동엽 앞에서 대학시절이 떠올랐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인생을 살아갔다... 이 시를 가사로 쓴 노래를 술 취해 부르곤 했다. 80년대 초 대학가는 삼엄하고 답답했다.

100년관 한켠에서 시인들 인터뷰 영상을 볼 수 있다. 정호승은 어머니가 가계부에 시를 쓰던 걸 추억했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  “시를 어떻게 쓰셨느냐”고 물으니 “시는 슬플 때 쓰는 거다”라고 하셨다. 그도 그렇다고 한다. 시는 외로움, 그리움, 슬픔 등 애틋함에서 나오나 보다.

정호승은 100년관에 자필 시 ‘수선화’를 남겼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백석대 현대시100년관은 시 100년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여준다.


백석대 현대시100년관은 희귀본 시집을 다수 전시하고 있다.

백석대 현대시100년관에는 시인들이 직접 글씨를 쓴 자작시가 전시되고 있다.

/천안·아산 선임기자  chohp11@kukinews.com

조한필 천안·아산 선임기자
조한필 기자
chohp11@kukinews.com
조한필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