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의대 교수진께 묻습니다. 환자 생명과 전공의 처벌 불가 요구 중 어느 것이 우선하는 가치입니까. 당연히 환자 생명입니다. 온 국민이 알고 서울대 교수진도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지금 이 상식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김성주 한국중증질환연합회장)
국내 최고 의료기관으로 손꼽히는 서울대병원이 유례없는 혼란을 겪고 있다. 교수들이 오는 17일 집단 휴진을 예고하면서다. 병원장이 교수들을 만류하고 나섰지만 강경한 태도를 꺾지 않고 있다. 간호사 등 다른 직원들은 환자 진료 예약 취소·변경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환자들의 불안감은 갈수록 커지고, 병원 내·외부에서 규탄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오는 17일부터 응급실과 중환자실 등 필수 부서를 제외한 모든 진료과의 무기한 전체 휴진을 예고했다. 비대위에는 서울대병원과 분당서울대병원,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 강남센터 등 4개 병원 교수들이 속해 있다.
김영태 서울대병원장이 불허 방침을 표명했지만 교수들은 휴진을 강행하기로 했다. 휴진을 ‘정의로운 길’로 표현하며 정부가 전공의에게 내린 행정처분 절차를 완전히 취소하지 않는 이상 결정을 접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비대위는 지난 9일 성명을 통해 “전체 휴진이라는 극단적인 선택 외에 남아있는 방법이 없다”며 “교수들의 결의는 전공의 복귀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만족시키려는 몸부림이다”라고 밝혔다. 이재협 서울시보라매병원장은 지난 11일 아침 긴급회의를 소집해 개인 휴가를 내지 않는 이상 전체 휴진 결정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교수들에게 전한 것으로 파악됐다.
전공의에 이어 교수들도 환자를 등지고 단체 행동에 나서려 하자 간호사부터 일반 직원들까지 큰 혼란에 빠졌다. 급기야 병원 노동조합이 직원들에게 “교수들의 휴진에 협조하지 말라”고 안내하고 나섰다. 분당서울대병원 노조는 지난 10일부터 병원 곳곳에 ‘히포크라테스의 통곡’이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이고 교수들에 “휴진 결의를 멈춰달라”고 촉구했다. 대자보에는 “의사 제국 총독부의 불법 파업 결의를 규탄한다. 휴진으로 고통받는 이는 예약된 환자와 동료뿐”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또 교수가 직접 환자에게 진료 변경사항을 안내하라고 통보했다. 노조에 따르면 하루 휴진을 위해선 검사와 시술, 수술 등 약 2만1000건의 예약을 변경해야 한다.
콜센터 직원과 간호사 등이 환자에게 진료 변경에 대해 연신 설명하고 사과하며 감정노동에 시달렸다는 주장도 나왔다. 윤태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서울대병원지부장은 12일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환자 피해가 제일 크겠지만 직원들 피해도 만만치 않다”며 “환자 전화 등 불필요한 일이 추가로 생겨 본래 업무가 밀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집단 휴진은 사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환자뿐만 아니라 병원 동료들에 피해가 전가될 것이라며 휴진 철회를 요구하고 있지만 거부하고 있어 고충이 크다”고 덧붙였다.
환자들은 휴진 결정에 분통을 터트렸다. 만성 천식 치료를 위해 수년째 서울대병원을 찾고 있다는 박호영(56·가명)씨는 약 봉투를 보여주며 “다음 주부터 휴진하면 언제 약을 탈 수 있을지 몰라 평소보다 더 많은 약을 처방받았다”고 했다. 박씨는 “의사들이 왜 환자를 뒤로 하고 병원을 나서려는 건지 모르겠다”면서 “환자 생명을 담보로 한 파업이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정말 묻고 싶다”고 비판했다.
최근 혈액암 진단을 받은 아버지의 치료를 위해 서울대병원을 방문한 한주애(48·가명)씨는 “아직까지 병원으로부터 진료 예약을 변경해야 한다고 전달받지 못했다”면서도 “일정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답답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동네병원까지 문을 닫는다고 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요즘은 아프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며 “평소 의사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의사들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고 토로했다.
중증질환자들은 “치료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해달라”고 촉구했다. 한국중증질환연합회는 서울대병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면 휴진을 즉각 철회하라”고 밝혔다. 변인영 한국췌장암환우회 회장은 “진료가 필요한 환자가 하루에도 수만 명에 달한다. 중증질환자들은 오늘 하루의 치료가 생명과 직결된다”면서 “치료 기회조차 얻지 못하면서 병을 이겨내겠다는 신념마저 무너져간다. 부디 생명의 가치를 존중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료진도 환자를 생각하면 무기한 전면 휴진이 부담스럽긴 마찬가지다. 서울대병원 A교수는 “비대위의 목표는 예정된 수술과 외래를 취소하는 것으로, 비대위가 준비한 교육프로그램 등에 참여하기를 권하고 있다”며 “교수들도 전면 휴진은 쉽지 않은 결정이다”라고 전했다.
서울대병원 B교수는 “암환자를 보는 교수는 휴진 결정이 정말 어렵다. 항암제 처방을 위해 오기로 했던 환자가 한번 밀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밀려 원래보다 두 배 넘는 환자를 보게 될 수 있기 때문”이라며 “명분 없는 파업에 대한 불만을 갖고 휴진을 찬성하는 강경파에 반기를 드는 의사들도 있다”고 털어놨다.
서울대병원 휴진을 둘러싼 혼란이 확산되자 유홍림 서울대 총장까지 나서 중재에 나섰다. 서울대병원 이사장을 겸하고 있는 유 총장은 지난 10일 교수들을 향해 “휴진 의사를 보류하고 진료와 교육 현장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대한 위험이 더 커지지 않도록 현재 상황을 속히 해결해야 하는 책임을 우리 모두 갖고 있다”면서 “현재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대화다. 이번 주가 가기 전에 모든 관계자가 만나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