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집단 이탈로 촉발된 의·정 갈등이 넉 달 넘게 지속되며 의사 사회를 바라보는 국민적 여론은 극도로 악화됐다. 의사들은 진료 거부에 따른 정부 제재보다 환자들의 신뢰를 잃는 게 더 두렵다고 말한다. 의료공백 사태로 금이 가버린 의사와 환자 간 유대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이제라도 벼랑 끝 대치를 멈춰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5일 의료계에 따르면 의정 갈등이 평행선을 달리는 사이 의사에 대한 국민적 불만과 증오는 극심해졌다.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의사를 ‘의주빈’(의사+조주빈), ‘의마스’(의사+하마스)라고 지칭하며 조롱하는 글이 올라온다. 지난 18일 대한의사협회(의협) 주도로 진행된 집단 휴진을 두고 시민들은 ‘휴진 병원 리스트’를 공유하며 의료 서비스 소비자로서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장기화되는 의료공백 사태에 분노한 환자들은 집단행동을 계획하고 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환단연), 한국유방암환우총연합회 등 환자단체들은 다음 달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의사 집단휴진 철회 및 재발방지법 제정 촉구 환자 총궐기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주최 측이 서울 종로경찰서에 집회신고 한 인원은 1000명이다. 환단연에는 한국백혈병환우회, 한국GIST환우회, 한국신장암환우회, 암시민연대, 한국선천성심장병환우회, 한국건선협회, 한국1형당뇨병환우회, 한국신경내분비종양환우회, 한국PROS환자단체 등이 속해있다.
환자단체들이 대규모 집단행동에 나서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지난 2014년, 2020년에 있었던 의사 집단행동 때에도 직접 대규모 집회를 개최한 적은 없다. 안기종 환단연 대표는 “그동안 집회를 자제했지만 의대 정원 증원이 확정됐는데도 무기한 집단 휴진을 하겠다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더는 못 참겠다’는 공감대가 환자들 사이에서 형성됐다”며 “환자 생명을 갖고 집단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환자들이 직접 단호히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들은 진료와 수술에 차질이 생겨 분통을 터트렸다. 또 의사들이 집단행동을 하는 이유로 ‘밥그릇 지키기’ 등을 꼽았다. 온라인 설문 플랫폼인 엘림넷 나우앤서베이가 지난 12일부터 이틀간 만 18세 이상 전국 패널 103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7.3%는 ‘의사 파업이 국민의 건강권을 침해해 반대한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63.7%는 의사들의 투쟁 목적에 대해 ‘기득권 지키기 때문’이라고 응답했고, 60.3%는 ‘의료 파업으로 본인 또는 가족이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파업의 가장 큰 부작용을 묻는 질문엔 58%가 ‘국민들의 건강권 침해’라고 답했다.
의사 사회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악화일로를 걷는 상황에서 일선 의료 현장에선 그동안 쌓아 올린 의사와 환자 간 유대관계가 되돌리기 힘들 정도로 무너졌단 한탄이 나온다.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의사회 회장은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젊은 의사들이 더 이상 환자를 볼 자신이 없다며 실의에 빠졌다”고 전했다. 또 사태가 종결되더라도 사직 전공의 전원이 돌아온단 보장이 없고, 뿌리 깊게 박힌 정부에 대한 불신 때문에 의료 정책 추진에 차질을 빚을 것이라고 짚었다.
이 회장은 “환자가 의사에 대한 믿음을 거둔 만큼 의사도 국민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다”면서 “이는 곧 환자 피해로 이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잃어버린 양측의 신뢰는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불하든 회복하기 어렵다”며 “정부는 전공의만 돌아오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문지호 의료윤리연구회 회장은 정부가 의사와 환자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 문 회장은 “의사 혐오 현상이 퍼지면 환자와 보호자는 진료를 받은 후에도 불쾌한 감정이 남아 치료가 잘 안 될 것”이라며 “반대로 국민에게 실망한 의사는 환자가 작은 불편을 호소해도 마음을 닫고 환자를 위해 헌신할 정성을 잃을 수 있어 걱정이다”라고 우려했다.
황규석 서울특별시의사회 회장은 “의정 갈등 사태가 끝나더라도 예전 같은 의료 현장의 모습을 되찾기 힘들다”며 의사와 국민 사이가 더 멀어지기 전에 정부가 적극 나서 봉합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의사들이 돈도 많이 벌면서 환자를 버렸다’고 여기게 만들었고, 시민들에게 의사를 향한 분노와 적개심을 주입시켰다”고 주장했다. 황 회장은 “우린 환자를 저버린 적이 없다”며 “대학병원 교수들이 다 떠나도 환자 곁을 지키겠다. 의사들을 조금만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달라”고 촉구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