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추억들이 많아서 이 나라가 굉장히 좋아졌어요.” 영화 ‘하얼빈’(감독 우민호) 촬영지이기도 했던 라트비아에 체류 중인 배우 박정민의 너스레다.
26일 화상 인터뷰로 만난 박정민은 ‘하얼빈’에서 독립운동가 우덕순 역을 맡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척결하는 독립투사들의 여정을 숭고하게 담아내기 위해, 그 역시 라트비아를 비롯해 몽골, 한국을 오가며 쉽지 않은 촬영을 소화했다. 이 과정에서 현빈(안중근 역), 조우진(김상현 역), 전여빈(공부인 역), 박훈(모리 다쓰오 역), 이동욱(이창섭 역)과는 현실 ‘동지’가 됐다.
“혹한에도 다들 웃음을 잃지 않았어요. 서로 좋아했고 따뜻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많이 힘든 촬영이었음에도 언제 힘들었는지 생각하면 딱히 떠오르지 않아요. 이 현장을 그 정도로 좋아했다는 거죠. (영화 ‘휴민트’ 촬영‘으로) 라트비아 와서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그때 동지들과 걸었던 거리를 혼자 걷게 됐어요.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잊지 못할 추억이에요.”
우덕순은 역사에 이름을 남긴 독립투사지만, ‘하얼빈’ 우덕순은 그 시절 있었을 법한 ‘사람’으로 그려졌다. 인간미가 돋보이는 캐릭터는 관객과의 거리감을 좁히며, 장엄한 극에 때때로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배경에는 박정민의 설득력 있는 연기가 있었다. 영화 ‘동주’에 이어 또 실존인물으로 분한 그는 부담감을 느끼는 대신 영화적 요소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고 전했다.
“예민한 작업이죠. 상당한 부담감이 있고요. 그래도 한 번 해봤잖아요. 그 부담감에, 그 숭고한 마음에, 함몰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당연히 실존인물을 해치지 않는 것이 우선돼야 하지만, 여기에 함몰돼서 영화적인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려고 했어요.”
“영화를 여러 번 보신다면 우덕순이라는 사람을 한 번쯤 봐달라”고 당부할 만큼 인물에 대한 애정이 상당했다. 거듭 ’우직하지만 외로운 사람‘이라고 설명했는데, 그가 이처럼 캐릭터를 해석하게 된 비하인드가 따로 있었다.
“영화에 나오지 않았지만 기차에서 안중근, 김상현, 우덕순이 편지를 쓰고 읽는 신이 있었어요. 안중근은 아내에게, 김상현은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는데, 우덕순은 안중근과 김상현에게 썼어요. 사실상 유서인데, 마지막까지 이 사람이 편지를 남길 사람이 동지라는 게, 제 기준에서는 많이 외로워 보였어요. 그래서 ’누군가는 이 인물을 봐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마음으로 연기했어요.”
그간 강렬한 한 방이 있는 캐릭터들을 소화해온 그에게 우덕순은 비교적 평면적이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오직 ’우덕순‘이었다. 욕심 나는 인물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저는 제 역할이 좋았어요. 개인적으로 우덕순을 연기하고 있는 제 얼굴과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어요(웃음). 제 영화를 보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 아닌데, 이번에는 괜찮더라고요. 물론 역할마다 매력이 다 다르고, 시나리오상 표현된 인물들의 깊이도 다 다르죠. 하지만 저는 우덕순이라는 인물을 고민하고 연기하면서, 제가 안 해봤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이런 얼굴도 나름 괜찮은데‘ 싶었죠. 우덕순이라는 인물을 잃고 싶지 않아요.”
우덕순과 김상현의 관계성도 ’하얼빈‘을 보는 재미 중 하나다. 연기로 정평이 난 박정민과 조우진의 만남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박정민도 관객 못지않게 조우진과의 연기에 깊은 인상을 받은 분위기였다. 호흡을 묻는 말에 “말하려면 시간이 모자랄 정도”라고 운을 뗐다.
“‘이런 배우와 한 앵글 안에서 호흡을 맞출 수 있다니, 이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굉장히 많았어요. 이 사람의 역사가 궁금해질 정도였어요. 제가 이런 질문을 안 하는 편인데, 어떻게 연기를 시작하셨고, 어떤 과정을 거치셨고, 어떤 일을 하셨고, 이런 것들을 막 물었었어요. 모든 것을 걸고 작품에 임하시는 것을 보고, 이분께 ‘연기가 뭐길래’, ‘영화가 뭐길래’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참 많은 질문거리를 던져주셨어요.”
‘하얼빈’은 자신에게 곧 ‘자부심’이라는 그는 역사를 다룬 이 영화가 보는 사람들의 역사를 다시 만나 여러 갈래로 뻗어가기를 희망했다. “꽤 자랑스러운 영화로 기억될 것 같아요. 근사한 영화잖아요. 진심을 다해서 작품을 만든 것이 저희의 몫이라면, 보시는 분들께서는 이 진심에 본인의 역사를 더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여러 모양으로 이 영화를 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전,란’, ‘1승’, 드라마 ’더 에이트쇼’, ’조명가게’등 쉴 틈 없이 대중을 만난 그는 ’하얼빈‘으로 숨 가빴던 한 해를 마무리한다. 최근 출연한 유튜브 예능에서 안식년을 언급해, 그의 향후 행보에 더욱 관심이 쏠린다. 이와 관련된 질문을 받은 그는 흥미로운 답을 내놓았다.
“사실 하고 싶은 건 없어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하고 싶어요(웃음). 하지만 탱자탱자 놀 수는 없으니까요. 어엿한 출판사를 만들자는 계획이 있어요. 이미 시작한 일이고,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본업에 집중할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이고 체계를 갖춘 회사로 만들어놓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