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외교부가 ‘민감국가’ 지정에 대한 미국내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사전에 전혀 간파하지 못해 아무런 대응 조차 못했던 것에 대해선 반드시 신상필벌이 있어야 한다. 우리 정부가 ‘민감국가’ 지정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시키겠다고 공언하며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향후 전개될 상황은 여전히 안개속이다. 우리나라가 민감국가로 지정된 원인에 대해 다양한 추측이 제기되고 있지만, 어느 특정 사안이 아닌 미국 행정부가 범정부 차원의 종합적인 판단에 따라 내린 결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달리 말해서, 원자력, 에너지, 첨단기술 협력 등에 대한 우리의 입장 변화로 민감국가 지정에 따른 피해를 막아 보겠다는 1차원적인 접근법은 오히려 우리의 국익을 스스로 훼손시키는 상황까지도 자초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경제안보(Economic Security) 정책을 표방하고 있다. 이 같은 국가정책의 방향성이 트럼프 대통령 개인의 리더쉽이 투영된 결과라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된 미국의 경제 정책을 비롯한 글로벌 리더쉽이 21세기 글로벌 환경 급변속에서 더 이상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인식은 이미 미국 조야에선 일반화된 평가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도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쿼드(QUAD) 등의 지역 중심의 경제안보공동체 구성과 역할 강화을 위한 전략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효과는 미비했다. 이와같이 미국의 전략적 취약성이 확대되는 반면 중국의 급성장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미중관계를 떠나서 글로벌 질서의 변화를 촉진시키고 있다.
유럽연합 역시도 경제안보를 강화시키는 대내외적인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유럽은 미국에 대한 경제안보 의존도를 낮추고 유럽내 새로운 형태의 집단방위체제 구축 및 활성화를 위한 노력에 집중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종전에 대한 논의가 유럽내 이 같은 변화를 더욱 촉발시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대로 유럽 국가들이 병력 및 군비 확충을 본격화 할 경우 미국은 또 다른 전략적 고심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유럽과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글로벌 차원에서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는데 있어 효과적인 지렛대로 활용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유럽의 전략적 의존도가 감소됨에 따라 유럽은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더 이상 ’과거의 유럽‘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유럽‘을 지향할 것이 분명하다. 미국이 요구한 유럽의 변화가 미국에게 새로운 부메랑으로 돌아올 날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위와 같은 변화의 중심은 커녕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도 아닌 변화에 적응하는 세력에 머물러있다. 반면, 인도, 호주, 일본 등은 미국과 유럽 뿐만 아니라, 남미, 아프리카 등의 지역에서도 전략적 변화를 주도하는 중요 행위자로 이미 자리매김하고 있다. 미국의 민감국가 지정으로 우리나라의 대외 취약성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이번 민감국가 지정이 우리나라 대외관계 전반에 미칠 여파를 고려해 범정부 차원에서 한미관계를 넘어 글로벌 변수로 인식하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 같은 정부의 노력에 여야 정치권도 서로에 대한 비난을 멈추고 적극 협력해야 할 것이다. 한편, 미국내 우리 외교부의 역량이 여과 없이 방증된 이번 민감국가 지정 사태를 교훈으로 우리 정부 부처가 미국의 대응 조직과 소통 및 협력하는데 있어 외교부의 과도한 조정 및 통제 지양 등을 포함하여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미국내 우리 외교 역량의 강화를 위한 특단의 대책을 모색해야 한다.
박진호 국방부 정책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