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상피세포성장인자수용체(EGFR) 엑손 20 삽입 돌연변이 비소세포폐암(NSCLC) 환자로부터 ‘리브리반트’(성분명 아미반타맙)의 급여 적용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메일을 받았다. EGFR 변이 비소세포폐암 환자 중 약 12% 이내로 드물게 발생하는 이 돌연변이는 기존 표적치료제에 잘 반응하지 않아 치료 선택지가 극히 제한적이다. 글로벌 제약사인 존슨앤드존슨의 리브리반트가 지난 1월 항암화학 병용요법으로 1차 치료제로 허가받았지만, 비급여인 탓에 환자들은 1년에 1억5000만원 이상의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치료 초기에는 한 달에 4회 투여가 이뤄져 치료 첫 달에만 약 3000만원의 비용이 든다.
환자는 “임상적으로 더 뛰어난 리브리반트 1차 병용요법을 선택하려면 수천만원의 약값을 전액 자비로 부담해야 한다”며 “병으로 인해 경제적 생존권까지 위협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루하루가 절박한 환자와 가족의 입장에서 이 상황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고 변화로 이어지길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한국에서 신약은 ‘그림의 떡’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까지 받았지만, 정작 환자들은 쓸 수 없다.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거나, 들어왔더라도 건강보험 급여를 받지 못해 비싼 약값을 고스란히 환자가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환자단체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생명을 연장하는 혁신적 치료제로 불리는 약들이 한국에선 ‘있지만 없는 약’으로 취급된다”고 말한다.
희귀질환 분야는 더 심각하다. 국내 환자 수가 적다는 이유로 제약사들이 시장성 부족을 이유로 들어 국내 출시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설령 도입된다 하더라도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르는 약값은 사실상 일반 가정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웃돈다. 급여 신청을 해도 심사 기간이 길고, 통과 가능성은 불확실하다. 미국제약협회(PhRMA) 보고서를 보면, 2021년 기준 최근 10년간 전 세계에서 개발·허가된 혁신의약품 408개 중 급여 적용 후 한국에 도입된 치료제는 35% 정도에 불과하다.
한국의 까다로운 신약 허가·급여 규제는 글로벌 제약사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제약사 간 복잡한 가격 협상과 급여 등재 절차는 수년씩 걸리기 일쑤다. PhRMA에 따르면 해외에서 출시된 뒤 한국에 1년 안에 진입하는 신약은 단 5%에 그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8%에 비해 3배 이상 차이가 난다. 또 한국은 미국에서 최초 허가된 항암제나 희귀의약품을 도입하는 데까지 평균 27~30개월이 걸린다. 독일(9~15개월), 영국(12~15개월), 캐나다(15~18개월) 등 주요 국가와 비교하면 매우 더딘 걸음이다. 평균 신약 급여율 역시 G20(28%), OECD(29%)에 비해 한국은 22%로 떨어진다.
급기야 PhRMA는 ‘수출 의약품의 가격을 인위적으로 낮게 책정해 자국 산업에 피해를 주는 국가’로 한국을 콕 집으며 미국 정부에 무역 협상을 통해 약가 정책을 개선해야 한다고 압박하고 나섰다. “한국 건강보험 당국이 약값을 공정한 시장 가치 이하로 억제하기 때문에 제약 관련 예산에서 혁신 신약에 쓰는 비중이 다른 OECD 국가보다 낮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신약의 허가와 급여 적용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도 있다. 정부의 까다로운 절차는 답답해 보일 수 있지만, 전체 건강보험 시스템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보호책이기도 하다. 건강보험 재정은 모든 국민이 납부하는 보험료를 재원으로 하기 때문에 고가의 신약을 급여 대상으로 포함시킬 경우 재정 부담이 급격히 커질 수밖에 없다. 특히 유의미한 생존율 개선이 입증되지 않았거나, 기존 치료제와 비교해 비용 대비 효과가 낮은 신약의 경우엔 더욱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제한된 재정 속에서 더 많은 국민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선 신약 도입 여부에 대해 엄격한 기준과 장기적 관점에서의 검토가 필수적이다.
정부도 국내 약가 정책의 불합리한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5일 바이오 기업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신약 허가 기간을 전 세계에서 가장 짧게, 획기적으로 줄이겠다”며 규제 개선 의지를 드러냈다. 정부는 허가 심사 기간을 현재 406일에서 295일로 줄이고, 보험 등재 기간을 최대 150일 이내로 단축하겠다고 밝혔다. 또 인공지능(AI) 기반 심사와 오가노이드 활용 대체실험으로 신약 개발 속도 자체를 혁신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바이오시밀러의 경우 안전성이 확보되는 범위 안에서 임상 3상을 면제해 심사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한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허가-급여평가-약가협상 동시 진행을 2027년까지 제도화해 건강보험 등재 기간을 대폭 줄일 예정이다.
‘건강보험 재정의 효율적 운영’이라는 명분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을 지키는 문제를 비용 논리에 가둬선 안 된다. 신약 접근성은 단순히 의약품을 쓰고 안 쓰고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 생명권과 직결된 사회적 가치다. 제도 개선 없이는 ‘있는 약도 못 쓰는’ 기형적 구조는 계속될 것이다. 환자들이 더는 ‘그림의 떡’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지 않도록, 정책과 행정은 신속하고 유연하게 변화해야 한다. 생명과 건강의 격차는 국가 간 의료 시스템의 차이에서 이어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