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악! 하나씩 해보자.”, “주자 뛴다. 태그 먼저 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숨 막히는 8월21일. 한여름 땡볕 아래, 경기 시흥의 한 야구장에는 기합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국민대학교 여자야구부(이하 야구부)’ 주장인 진희우(31·여)씨의 목소리였다.
국민대학교 여자야구부는 국민대학교 평생교육원 생활체육학부 소속으로 운영된다. 국내 대학 최초 엘리트 여자야구 선수 육성을 목표로 지난해 9월 창단해 선수 모집을 시작했다. 현재 12명의 선수가 활동 중이며, 대부분은 20대다. 선수들은 평일에는 시흥에서 훈련하고, 주말에는 국민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야구 이론 강의를 듣는다.

서른, 사회복지사 대신 야구를 택하다
진씨는 서른 살이던 지난해 12월, 사회복지사 일을 그만두고 시흥으로 이사했다. 국민대학교에 여자야구부가 창단된다는 소식을 듣고, 야구를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꿈은 고등학교 시절에 시작됐다. 당시 진씨는 야구선수의 길을 꿈꿨지만, 가족의 반대로 무산됐다. 진씨는 “고등학생 때 뜬금없이 야구가 너무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가족들에게 말했는데, 프로리그나 실업팀조차 없는 여자야구 현실을 알던 가족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어요. 지금은 그 마음을 이해하지만, 그때는 정말 큰 상처였어요.”라고 회상했다.
결국 진씨는 야구의 꿈을 접고, 노인체육 사회복지사의 길을 택했다. 그 후로는 일부러 야구를 멀리했다. 그는 “야구를 보면 마음이 자꾸 불편해서 억지로 외면했어요. 지금도 야구 영화는 용기가 없어 못 보고 있어요.”라고 털어놨다.

성인이 되어 다른 길을 걸었지만, 진씨의 마음속엔 여전히 야구에 대한 갈증이 남아 있었다. 그러던 지난해, 친구를 통해 국민대학교 여자야구부 창단 소식을 접했다. 결국 그는 하던 일을 내려놓고 야구를 선택했다. 진씨는 “야구가 너무 하고 싶었어요.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지난해 12월 모든 걸 정리했죠.”라고 말했다.
야구부에 들어온 뒤, 진씨의 머릿속은 온통 야구로 가득 찼다. 그는 “아침 9시에 일어나면 ‘아, 행복해. 오늘은 무슨 훈련을 할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룸메이트는 제가 하루 종일 야구 생각만 한다고 미쳤다고 해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이어 “하루 7~8시간씩 훈련을 하고, 집에 가면 야구 이론을 공부해요. 유튜브도 야구 영상밖에 안 봐요.”라고 말하며 야구에 대한 애정을 고백했다.

발가락 분쇄골절도 막지 못한 야구 사랑
진씨의 포지션은 투수의 공을 받는 포수다. 공이 예기치 않게 튀면 쉽게 부상을 입을 수 있는 자리다. 지난 1월, 그는 훈련 도중 발에 공을 맞아 ‘발가락 분쇄골절’이라는 큰 부상을 당했다. 평소에도 공에 맞는 일이 많았지만, 그날만큼은 유독 고통이 심했다고 한다.
진씨는 “제가 웬만하면 아프다는 말을 잘 안 해요. 그런데 그날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래도 끝까지 투수들 공을 다 받아주고 개인 훈련까지 하다가 결국 쓰러졌죠. 병원에 갔더니 발가락이 산산조각 났다고 하더라고요.”라며 당시의 충격을 떠올렸다.
야구부는 첫 전국 대회인 선덕여왕배 전국여자야구대회 출전을 앞두고 있었다. 진씨는 발가락 골절로 6개월 재활 진단을 받아 출전이 불투명했다. 그럼에도 그는 깁스를 한 채 배팅 훈련에 매달렸다.

첫 전국대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괴로웠지만, 감독의 한마디가 마음을 붙잡아 줬다. 진씨는 “감독님이 우리 팀은 ‘캡틴인 저와 함께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 말 덕분에 용기가 생겼어요.”라고 했다. 결국 진씨는 부러진 발가락에 감았던 깁스를 풀고, 앞코가 단단한 공사장 안전화를 구해서 신고 첫 전국 대회에 섰다.
‘주장’이라는 완장의 무게
야구부에 들어올 때만 해도 진씨는 팀플레이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2년 동안 야구만 배우고 사라져야겠다”는 생각으로 입단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곧 감독은 그에게 주장직을 맡겼다.
마지못해 완장을 찼지만, 동료들의 열정을 보며 마음이 달라졌다. 그는 “새벽 4시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훈련에 나오는 친구도 있고, 야구 때문에 홀로 경남 창원에서 올라와 지내는 친구도 있어요.”라며 어려운 환경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부원들을 위해 책임감을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야구부원 12명 대부분은 공을 처음 잡아보는 초심자였다. 그래서 진씨는 늘 “우리는 ‘죽기 살기’가 아니라 ‘죽기 죽기’로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끊임없이 연습해 야구가 온전히 우리 것이 돼야 실전에서 즐길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죽기 죽기를 목표로 훈련한 결과, 성적은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 진씨는 “지난 6월 군포 주니어 리틀야구단과 경기했을 때는 24대 2로 대패했어요. 그 친구들이 저희를 갖고 놀았죠.”라며 웃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두 달 뒤 시흥북부리틀야구단과의 경기에서는 10대 10 접전 끝에 아깝게 졌다. 그는 “‘우리가 한 호흡으로 걸어가고 있구나’를 느낄 때마다 울컥 눈물이 난다.”며 야구부의 도약을 꿈꿨다.

여자야구, 새로운 시대를 꿈꾸며
한국여자야구연맹(WBAK)이 출범한 지 18년이 지났지만, 국내 여자야구 현실은 여전히 척박하다. 선수들이 체계적으로 성장할 육성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여자야구에는 프로리그나 실업팀이 없다. 4대 프로스포츠(야구·축구·농구·배구) 가운데서도 프로야구만 아직 여성 심판이 없다.
지난 2015년, 한국리틀야구연맹은 여자 리틀야구 선수의 활동 기간을 중학교 1학년에서 중학교 3학년까지로 늘리는 이른바 ‘김라경 룰’을 마련했다. 과거 여자야구 유망주였던 김라경(25) 선수가 중학교 2학년 때 팀을 잃을 위기에 처한 것이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이 규정은 중학교까지만 적용된다. 여전히 고등학생이 되면 갈 곳을 잃는 여자야구 선수들이 많다. 이런 현실에서 국민대학교 여자야구부의 등장은 새로운 활로를 연 것이라 평가된다.
국민대학교 여자야구부가 여자야구의 새로운 희망인 만큼, 진씨는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사실 우리 야구부는 즐기기만 할 수는 없어요. 우리가 잘해야 대학팀이나 실업팀이 생기고, 여자야구가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여자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야구에 다가갈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처럼 상처받는 아이들이 더는 없었으면 합니다.”라며 간절한 바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