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현장이 증명한 ‘근본’ K-뷰티…엘로엘 유양희 원장의 뚝심 [쿠키인터뷰]

30년 현장이 증명한 ‘근본’ K-뷰티…엘로엘 유양희 원장의 뚝심 [쿠키인터뷰]

유양희 엘로엘 원장, 30년 경험이 만든 브랜드
트렌드 쫓기보단 철학과 기술력으로 승부
2026년 매출 1000억 목표, 글로벌 확장 가속

기사승인 2025-10-09 06:00:07
유양희 엘로엘 원장이 모델 메이크업을 진행하고 있다. 엘로엘 제공

지금의 K-뷰티 붐을 만든 국내 1세대 K-뷰티의 명성을 기억하는가. 트렌디함보다 미(美)의 정석이 중요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수많은 트렌드가 쉴 새 없이 생기고 사라지며, 빠르게 제품 개발에 반영하는 것이 중요해진 시대와는 달리, 그때는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분명했다. 오랜 연구와 기술력을 쌓아 오늘의 K-뷰티 기반을 다진 1세대, 그 중심에 엘로엘이 있었다.

“화장품은 재구매가 되지 않으면 만들면 안 된다.”

30년 넘게 메이크업 현장에서 활동하며  화장품 업계를 두루 거친 1세대 아티스트 유양희 엘로엘 원장은 이 신념 하나로 브랜드를 세웠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내 이름을 걸고 만들 화장품”을 꿈꿨다. 일본 가네보 화장품, 미국 엘리자베스 아덴 등 글로벌 기업에서 브랜드 운영과 제품 개발을 직접 경험했다. 또 수많은 신부와 연예인의 메이크업을 담당하며 ‘좋은 베이스 제품’에 대한 집요한 고민을 쌓았다. 패키지 뒷면에는 그의 사인이 새겨져 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책임질 수 있는 화장품을 만들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시작은 쉽지 않았다. 메이크업을 배울 수 있는 길이 거의 없던 시절,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의 가네보 메이크업 스쿨 문을 두드렸다. 언어 장벽을 넘어 열흘 동안 설득 끝에 입학을 허락받았고, 현장에서 기술을 익혔다. 이후 가네보 한국 법인에서 경력을 쌓다가, 미국계 브랜드 엘리자베스 아덴으로 자리를 옮겨 브랜드 운영과 마케팅을 깊이 배웠다. 면세점 스테디셀러 ‘세라마이드 캡슐’ 프로젝트를 맡으며 제품이 제대로 만들어져야만 수십 년간 팔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꼈다. 그는 “화장품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재구매가 되지 않으면 만들면 안 된다”라는 신념을 확고히 했다.

엘로엘은 이러한 현장 경험과 철학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유 원장은 유행을 따라 브랜드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진짜 제품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창업에 나섰다. 당시 한국 뷰티 시장은 해외 명품 브랜드가 주도했고, 국내 제품은 ‘저렴하지만 품질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는 이 흐름을 바꾸고 싶었다.

“한국 기술력은 세계적으로 뛰어나지만, 얼마나 책임감을 가지고 제품을 만드느냐가 문제예요. ODM이나 OEM에만 의존하지 않고 개발 과정에 참여하고 싶었어요. 그래야 완성도 높은 화장품이 나온다고 생각했거든요. 수많은 샘플링과 실패를 거듭하며 제형, 용기, 사용성을 직접 다듬었어요.”

그간 유 원장은 꾸준히 피부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깨끗하고 맑은, 도화지 같은 피부가 메이크업의 기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엘로엘의 대표작 ‘블랑 커버 크림스틱’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엘로엘의 블랑 커버 크림스틱. 엘로엘 제공

블랑스틱은 하얀 크림 제형이 피부 온도에 따라 변하며 자연스러운 톤을 만들어내는 엘로엘의 대표 베이스 제품이다. 기존 팩트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그는 무려 1년 6개월간 금형과 제형을 반복 수정했다. 퍼프가 아닌 브러시를 내장해 캡슐을 깨뜨리며 바르는 방식을 고안했고, 스틱 내부 구조를 안정화하기 위해 수십 차례 충진 실험을 진행했다. 이렇게 탄생한 블랑스틱은 홈쇼핑 첫 방송에서 60분 중 40분 만에 매진됐고, 10회 연속 완판을 기록하며 누적 800만 개 이상 판매됐다. 홈쇼핑 누적 매출은 3000억원을 넘겼다.

유 원장은 “사람들이 전문가 손길 없이도 피부를 예쁘게 표현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며 “과한 커버가 아니라 원래 내 피부처럼 표현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전했다. 

엘로엘은 ‘선쿠션’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연 브랜드이기도 하다. 당시 시장은 선크림·선스틱 일색이었다. 그는 파운데이션 위에 덧발라도 밀리지 않고 백탁 없는 자외선 차단제를 만들고 싶었다는 마음에 연구를 시작했다. 

“처음엔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았죠. 쿠션에 선크림을 넣어 팔 수 있겠냐는 회의적인 시선도 있었고요. 그래도 개발을 강행했고, 결국 세계 최초의 선쿠션을 시장에 내놨어요. 편리성을 무시할 수 없었거든요.” 

실리콘 퍼프, 빅사이즈 팩트, 브러시 일체형 스틱까지 모두 그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수백 명의 얼굴을 직접 메이크업하며 얻은 노하우가 아니었다면 나올 수 없는 발상이다.

브랜드 전략 역시 단기 유행과는 달랐다. 다수의 K뷰티 브랜드가 중국 시장을 먼저 공략했지만, 유양희 원장은 유럽을 택했다. 중국을 잘 모른 채 들어가면 브랜드가 망가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이탈리아를 거점으로 삼아 일찍부터 CPNP 인증을 취득하고, 약국과 편집숍 중심의 유통망을 개척했다. 

최근 엘로엘은 디지털 마케팅을 통해 새로운 성장곡선을 그리고 있다. 미국 시장 공략을 위해 틱톡을 활용했는데, 첫 영상 중 하나가 3800만 뷰를 기록하며 폭발적으로 퍼졌다. 이 바이럴은 광고가 아닌 오가닉 확산이었다. 스페인 인플루언서가 자발적으로 사용 후기를 올린 것을 시작으로 남미, 중동, 아시아까지 확산됐고, 하루 아마존 판매량이 수백 개에서 수천 개로 급증했다. 발주액은 단기간에 수십억 원대로 늘었다. 

현재 엘로엘에 연락하는 바이어의 90%는 틱톡을 통해 브랜드를 접한다. 이는 K-뷰티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글로벌 소비자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지표다. 까다로운 미국 FDA OTC 인증을 통과한 선쿠션과 블랑스틱이 그 흐름을 이끌었다.

이러한 성과는 단순한 운이 아니라 긴 준비의 결과다. 유 원장은 “보통의 브랜드들은 히트 상품을 하나 내고 후속이 없다. 우리는 블랑스틱·선쿠션·블렌딩 쿠션·클렌저 등 제품군을 꾸준히 확장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시장을 겨냥해 20가지 셰이드의 파운데이션을 준비 중이다. 흑인 피부까지 완전히 커버할 수 있도록 글로벌 연구원과 함께 개발하고 있고, 한국 제조사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미국과 유럽 전문가와 협업했다. 립과 쿠션 등도 글로벌 피부 톤과 사용성을 고려해 새롭게 기획 중이다.

그는 빠른 매각이나 단기 수익을 위해 ‘가성비’만을 내세우는 최근의 흐름을 아쉬워한다. K-뷰티 시장에는 짧은 유행처럼 등장했다 사라지는 브랜드가 적지 않다며, 철학 없이 만든 제품은 오래가기 어렵다고 말한다. 브랜드를 한다면 스스로의 철학을 지키고 묵묵히 기술과 신뢰를 쌓아가다 보면 결국 기회가 찾아온다고 강조한다. 빠른 성공을 좇기보다 30년간 현장에서 기술과 신뢰를 축적해온 경험이 믿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유양희 엘로엘 원장이 블랑 커버 크림스틱을 들고 있다. 엘로엘 제공

60대를 앞둔 그는 “이제는 전쟁 같은 비즈니스보다는 제품 개발에 집중하며 한국과 이탈리아를 오가고 싶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함께한 직원들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브랜드를 더 단단히 만들고, 자신은 창작자이자 개발자로 남는 것이 목표다. 

가성비를 앞세운 트렌디한 브랜드가 쏟아지는 K-뷰티 시장에서도 엘로엘은 ‘진심’과 ‘기술력’으로 길을 낸다. 사랑과 책임감으로 만든 화장품이 세계 무대에서 어떻게 오래 사랑받을 수 있는지, 유양희 원장과 엘로엘의 여정이 그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저는 한국의 메이크업 1세대 아티스트로 현장에서 오랜 경험을 쌓아 왔고, 화장품은 재구매가 될 만큼 신뢰를 줘야 한다는 신념으로 제품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 경험만으로도 엘로엘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돌아보면 10년의 시간과 그 이전에 준비해 온 거의 30년의 경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처음부터 브랜드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오래 준비해 온 만큼, 그 시간만큼은 누구도 쉽게 따라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심하연 기자
sim@kukinews.com
심하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