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97)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97)

서재 속의 초상: 예술로 읽는 지성의 얼굴

기사승인 2025-12-01 09:18:41
에두아르 마네, 에밀 졸라의 초상, 1868, 캔버스에 유채, 146x114cm, 오르세 미술관

예술과 문학의 교차점: 졸라의 서재에서

1868년,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는 살롱에 한 작품을 출품한다. 그것은 단순한 인물화가 아니었다. 그림 속 주인공은 작가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이다. 그는 1867년 “테레즈 라캥(Therese Raquin)”으로 자연주의 문학의 기수로 떠오른 인물이며, 마네의 예술을 누구보다도 강력히 옹호한 비평가였다.

<에밀 졸라의 초상>은 졸라의 서재를 배경으로, 시대의 예술적 흐름과 두 사람의 취향이 교차하는 시각적 선언문이다. 새가 그려진 일본식 금빛 병풍은 당시 유럽 미술계에 충격을 준 일본 미술의 영향력을 상징하고, 벽에 걸린 우타가와 구니야키(歌川國明) 2세의 우끼요에는 동양 예술에 대한 졸라의 관심을 드러낸다. 벨라스케스의 <바쿠스>에서 따온 판화는 마네와 졸라가 공유한 스페인 미술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다.

붓으로 쓴 우정: 마네와 졸라의 연대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졸라 뒤에 걸린 마네의 문제작 <올랭피아> 복제본이다. 당시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이 작품을 졸라는 ”현대 회화의 진정한 혁신”이라 평가하며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마네는 그런 졸라에게 감사의 뜻을 담아 이 초상화를 그렸다. 책상 위에 펼쳐진 샤를 블랑(Charles Blanc, 1813~1882)의 <그림의 역사>는 졸라가 예술을 단순한 감상이 아닌 사유와 비평의 대상으로 여겼음을 상징한다.

이 초상은 단순한 인물 묘사를 넘어, 예술가와 비평가의 우정, 그리고 새로운 예술을 향한 확신을 담은 선언이다. 마네는 붓으로, 졸라는 펜으로, 서로의 길을 밝혀 주었다. 이 그림은 그들의 연대가 남긴 가장 아름다운 흔적이다.

에드가 드가, 에드몽 뒤랑티의 초상, 1879, 린넨에 파스텔로 생동감을 더한 구아슈, 100x100.4cm, 글래스고 버렐 컬렉션

책과 사유로 빚은 초상: 드가의 뒤랑티

1879년, 에드가 드가는 친구이자 인상주의의 지지자였던 평론가 에드몽 뒤랑티(Edmond Duranty, 1833~1880)를 그렸다. 책상 앞에 앉아 턱을 괴고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모습은 단순한 포즈가 아니다. 그것은 사유의 순간, 지식인의 내면을 포착한 장면이다. 드가는 이 초상화에서 외형을 넘어선 뒤랑티의 정신적 풍경을 그려냈다.

잉크병과 두 개의 돋보기를 제외하면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오직 책과 팸플릿이다. 버렐 컬렉션의 첫 관장이 “뒤랑티가 아닌 것은 모두 책이고, 책이 아닌 것은 모두 뒤랑티다”라고 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초상은 단지 한 인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지식인이라는 존재 자체를 시각화한 작업이다.

예술가의 시선과 지식인의 정체성

드가는 이 작품에서 파스텔을 사용해 부드러운 빛과 미묘한 색채의 흐름을 표현했다. 전체를 파란 톤으로 강조한 화면은 사색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뒤랑티의 내면을 감싸는 듯하다. 드가의 초상화는 언제나 그렇듯, 단순한 외모 묘사를 넘어 인물의 심리와 정체성을 꿰뚫는다. <에드몽 뒤랑티의 초상>은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마네의 <에밀 졸라의 초상>(1868)과 함께, 예술가가 동료 지식인을 그린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두 그림 모두 책과 문헌을 배경으로 삼아, 모델의 직업 정체성을 강조한다. 세잔의 <귀스타브 제프루아> 역시 책꽂이를 배경으로 하지만, 세잔과 제프루아는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드가와 뒤랑티는 서로를 이해했고, 그 이해는 이 조용한 초상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말보다 깊은 시선, 색보다 진한 사유가 이 그림을 통해 전해진다. 그것이 바로 드가가 그린 ‘지식인의 얼굴’이었다.

에드가 드가, 에드몽 뒤랑티의 초상, 1879, 린넨에 파스텔로 생동감을 더한 구아슈, 100x100.4cm, 글래스고 버렐 컬렉션

초상화의 시작: 감사에서 비롯된 제안

1894년, 평론가 귀스타브 제프루아(Gustave Geffroy, 1855~1926)는 폴 세잔의 그림을 찬양하는 여러 기사를 발표했다. 세잔은 이듬해 봄, 감사의 표시로 그의 초상화를 그려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은 무려 80 여 차례나 모델을 세웠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미완의 초상은 오히려 세잔의 예술세계를 가장 강력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남았다.

<귀스타브 제프루아의 초상>은 보기 드문 대작이다. 중앙에 앉은 제프루와는 강력한 삼각형 구도를 형성하며 책, 잉크병, 장미, 로댕의 작은 조각상과 같은 다양한 배경은 그의 지적 활동과 문화적 정체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세잔은 점차 제프루와의 절충적인 미술 취향과 종교에 대한 무관심에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 감정은 노골적인 적대감으로 변해갔다. 요아킴 가스케(Joachim Gasquet, 1873~1921)는 "세잔이 그에게 품었던 설명할 수 없는 증오”를 회고하며, 편지나 대화에서 혐오감을 자주 드러냈다고 기록했다.

미완의 초상, 완성된 긴장: 세잔과 제프루아

그림 속 얼굴과 손이 미완성이다. 그러나 그 미완성은 오히려 인물의 불투명함과 신비로움을 강조하며, 심지어 위협적인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책장과 책상 위 사물들은 세잔 특유의 다중시점에서 바라본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훗날 입체주의의 선구적 시도로 평가받는다. 기하학적 구조와 독특한 원근법은 이 초상을 단순한 인물화가 아닌 회화적 실험의 장으로 만든다.

1907년 가을 살롱에서 열린 세잔 회고전에서 이 작품은 가장 많은 찬사를 받았다. 미완성이라는 한계가 오히려 예술적 긴장과 내면의 갈등을 시각화한 강점으로 작용한 것이다.

<귀스타브 제프루아의 초상>은 미완의 붓질 속에서 완성된 감정의 초상이다. 그것은 세잔의 예술이 지닌 복잡함과 정직함 그리고 인간관계의 균열까지 담아낸 보기 드문 작품이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 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 1475년경, 목판에 유화, 45.7x36.2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서재 속 초상: 사유의 공간을 그리는 예술

서재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이 깃드는 장소이며, 예술가들의 사유와 정체성을 시각화 하는 무대다. 이 공간을 배경으로 한 초상화는 르네상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성의 얼굴을 그리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 1425/1430~1479)의 <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가 기원이다. 4세기에 활동했던 성인이 책을 읽는 모습을 15세기 서재의 구조와 상징으로 정교하게 담아낸다. 성인은 그리스어로 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고, 그 “불가타(Vulgata) 성경”은 아직도 가톨릭에서 사용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에 플랑드르 회화의 정교한 유화 기법과 이탈리아의 선원근법이 결합된 독특한 화풍을 보여준다. 메시나는 시칠리아 태생으로 나폴리에서 교육받았으며, 1475 년부터 1476년까지 베네치아에서 활동했다. 

<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 부분

양쪽 창문으로는 중세 유럽의 풍경과 서재 위 창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제비가 날고 있다. 

<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 부분

공간의 확장과 상징의 배열

반복되는 아치와 타일 바닥은 선원근법의 정수를 보여주며, 작은 그림 안에 공작이 있는 입구부터 성인이 앉은 서재와 복도를 지나 창밖의 정원과 산까지 공간을 확장해 나간다. 

공작과 자고 새, 물그릇은 각각 영원, 진실, 순수함을 상징한다. 성인은 신발을 벗고 세 개의 계단을 올라 주교를 상징하는 빨간 모자를 내려놓고, 둥근 주교좌에 앉아 책을 본다. 선반과 단상에 여러가지 물건들이 있는데 책, 필사본, 작은 화분, 화병, 잠자는 고양이와 벽에는 십자가와 수건도 보인다.

오른쪽 역광으로 우아한 뒷태를 뽐내는 사자는 성인이 가시를 빼 준 뒤 따랐다는 전설을 반영하며, 성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 그림은 신앙과 지성의 조화를 시각화한 르네상스적 이상을 구현한다.

19세기 서재 속 초상의 계승 

19세기 프랑스 화가들은 이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했다. 마네는 <에밀 졸라의 초상>에서 서재를 배경으로 비평가 졸라의 예술적 취향과 신념을 드러냈고, 드가는 <에드몽 뒤랑티의 초상>에서 책과 잉크병, 돋보기를 통해 지식인의 내면을 포착했다. 세잔은 <귀스타브 제프루아의 초상>에서 책장과 책상 위 사물들을 다중 시점으로 구성하며, 미완의 얼굴과 손을 통해 예술가와 비평가 사이의 긴장과 불완전한 관계를 드러냈다.

인간 정신과 시대적 사유의 시각적 선언

이들 작품은 단순한 인물 묘사를 넘어, 서재라는 공간을 통해 인간의 정신과 시대의 사유를 담아낸 시각적 선언이다. 메시나의 성 히에로니무스가 신앙과 학문의 이상을 구현했다면, 마네, 드가, 세잔은 근대 지식인의 복잡한 정체성과 예술가의 시선을 담아냈다.

서재 속 초상은 시대를 초월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사유하며, 어떤 세계를 꿈꾸는가? 그리고 예술은 그 질문에 어떤 형태로 응답할 수 있는가? 이 초상들은 그 응답의 흔적이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 작가
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홍석원 기자
001hong@kukinews.com
홍석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