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식탁에 ‘스푸’(soup)라는 낯선 음식이 등장한 건 1970년 봄이었다. 밥과 국이 식생활의 전부였던 시절, 조리하면 따뜻한 수프로 완성되는 분말형 제품은 한국인에게 매우 생소한 음식이었다. 변화의 출발점은 풍림상사(현 오뚜기)가 내놓은 작은 분말 봉지 제품이었다. 오뚜기는 자사 제품명을 ‘스프’로 고유하게 명명했고, 1970년 4월6일 ‘산타 포타지스프’, 두 달 뒤 ‘산타 크림스프’를 잇달아 출시하며 국내 스프 시장을 공식적으로 열었다. 이는 국내 최초로 영문 상표를 단 스프의 등장으로 기록된다.
당시는 전쟁 직후 식량난이 심각한 시기였다. 미군 부대 음식 찌꺼기를 모아 끓인 ‘꿀꿀이죽’을 돈을 주고 사 먹어야 했을 정도로 현실은 척박했고, 국민 건강을 위한 식품 개발이 절실한 시기였다.
미국 원조로 들어온 밀가루가 서민 식탁을 빠르게 대체하던 가운데, “밥을 먹을 때 국을 먹듯, 빵을 먹을 때 스푸를 먹으면 어떨까”라는 함태호 명예회장의 발상에서 스프 개발이 시작됐다. 또한 그는 방향으로 굴려도 다시 일어나는 장난감 ‘오뚝이’처럼, 전쟁 이후 무너진 한국인의 식탁을 다시 세우겠다는 마음을 브랜드명 ‘오뚜기’에 담았다.
스프는 카레에 이어 오뚜기가 개발한 두 번째 제품으로, 기존에 어떤 레퍼런스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도전이었다.
그러나 개발 과정은 험난했다. 원재료 수급은 쉽지 않았고, 목표했던 겨울 출시도 지연됐다. 그럼에도 ‘산타’라는 이름을 단 스프 2종이 결국 시장에 나왔다. 겨울 시즌을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콘셉트와 영문 브랜드 전략은 소비자 눈길을 빠르게 끌었다.
출시 후 난관은 더 컸다. 당시 스프는 고급 레스토랑에서나 접할 수 있는 음식이었다. 샘플 증정만으로는 조리 경험을 전달하기 어려워 제품 특성도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오뚜기는 결국 ‘맛으로 설득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영업사원들이 백화점에서 직접 스프를 끓여 제공하고, 슈퍼마켓·등산로 입구 등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서 시식 행사를 이어가며 스프를 일상 음식으로 끌어들였다.
이러한 노력은 성공적이었다. 오뚜기 스프는 55년간 시장 1위를 유지했다. 처음 맛본 스프가 오뚜기 스프라는 경험은 세대를 건너 이어졌고, 학교 급식·회사 식당·경양식집 등 다양한 생활 공간에서 동일한 맛이 반복 경험되며 자연스럽게 ‘표준 맛’으로 자리 잡았다. 외식업계에서도 오뚜기 스프는 스테이크·돈가스를 내는 경양식집의 기본 전체 메뉴로 자리 잡으며 브랜드 영향력이 확대됐다.
3000억 시장으로 성장…스프 제품은 꾸준히 진화 중
시장조사업체 IMARC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 스푸 시장 규모는 약 3000억원이며, 오는 2033년에는 약 4860억원 수준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가운데 오뚜기 스프는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오뚜기의 라인업 역시 꾸준히 확장됐다. 1970년 크림스프를 시작으로 양송이·옥수수·쇠고기 등 클래식 스프가 출시됐고, 최근에는 ‘헝가리안 비프 굴라시’처럼 스튜 형태 제품까지 다양해졌다.
조리 방식도 시대 변화에 맞춰 진화했다. 끓는 물에 풀어야 하고 덩어리 지기 쉬웠던 초기 분말스프는 컵스프·액상스프 등으로 바뀌었고,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되는 즉석형, 전자레인지로 데우는 액상 제품까지 등장하며 현대적 간편식으로 재해석됐다. 현재 오뚜기는 냉장 액상(3종), 상온 액상(7종), 분말(7종), 컵스프(7종) 등 총 24종을 운영 중이다.
오뚜기 스프가 오랜 기간 표준 맛으로 자리 잡은 배경에는 철저한 품질 관리와 소비자 피드백 반영이 있다. 감자스프의 경우 ‘건더기 식감이 아쉽다’는 의견이 반영돼 감자 큐브가 추가됐고, 컵스프에서는 ‘분말이 잘 안 풀린다’는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최근 제품은 15초만 저어도 부드럽게 풀리도록 제조 공정을 개선했다. 오뚜기는 스프가 익숙한 음식일수록 더 나은 조리 경험이 중요하다고 보고, 관련 개선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오뚜기 관계자는 “55년 동안 표준 맛을 유지해온 비결은 철저한 품질 관리와 소비자 이해”라며 “오랜 기간 축적된 데이터와 경험을 바탕으로 입맛 변화를 면밀하게 분석해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본 레시피는 유지하되 트렌드 변화에 따라 후추나 염도의 강도를 조절하는 등 미세 조정을 꾸준히 이어왔다”고 설명했다.
오뚜기는 앞으로 스프 시장의 미래 키워드를 ‘건강’과 ‘확장’으로 보고 있다. 글루텐프리 라인업인 ‘비밀스프’·‘비밀컵스프’를 통해 건강성을 강화하고 있으며, 간편식 시장 확대에 맞춰 컵스프·액상스프의 편의성을 높이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해외 시장도 본격 공략할 계획이다. 오뚜기 관계자는 “K-푸드 트렌드에 맞춰 한국 고유의 스프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외국 소비자도 즐길 수 있는 메뉴 개발을 지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