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불끄기’에 국민노후 투입?…국민연금 외화채 발행 초읽기

‘환율 불끄기’에 국민노후 투입?…국민연금 외화채 발행 초읽기

기사승인 2025-12-11 06:00:09
국민연금 지부의 모습. 연합뉴스

환율 방어를 위한 ‘국민연금 등판론’이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정부가 국민연금을 통한 외화채권 발행 검토에 나서면서다. 외환시장 안정화가 목적이지만, ‘국민 노후자금’을 동원한다는 비판도 거세질 전망이다.

11일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원·달러 환율은 1470원 내외에서 요지부동이다. 전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 주간거래 종가(오후 3시30분)보다 1.9원 내린 1470.4원으로 장을 마쳤다. 종가 기준으로는 9일에 이어 이틀 연속 1470원대를 기록했다. 1470원대 환율은 미중 무역 갈등이 격화했던 4월9일(1484.1원) 이후 최고치다. 고환율이 지속되면 에너지·원자재 등 수입 의존도가 높은 물품을 중심으로 물가가 올라 기업 수익성이 나빠진다. 투자 심리도 함께 위축된다.  

이에 정부는 국민연금의 외화채 발행 카드를 꺼내들었다. 보건복지부는 최근 외화채 발행 필요성과 타당성 등에 대한 연구 용역을 발주했다. 관련 법 개정 추진 여부도 함께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행 국민연금법은 연금사업 재원을 보험료·기금운용 수익·적립금·결산 잉여금 등 4가지 재원으로만 한정해, 외화채 발행을 위해선 국민연금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 

외화채는 해외에서 외화로 발행하는 채권을 뜻한다. 역외시장에서 외화채 발행을 통해 해외 투자 자금을 직접 조달하면, 현물환 시장에서 원화를 팔아 달러를 확보해야 하는 규모가 줄어든다. 신규 해외투자 자금의 달러 매입수요가 분산돼 환율 안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국민연금의 운용규모는 지난 8월 기준 1322조원으로, 이 중 58%인 771조원이 해외투자다.

외화채 발행 규모와 시기 등 구체적인 사항은 정부가 환율 대응을 위해 꾸린 기획재정부·복지부·한국은행·국민연금 4자 협의체에서 논의될 전망이다. 4자 협의체는 환율 대응을 위해 올해 말 만료 예정인 외환당국·국민연금 간 외환스와프 계약 연장 등 다양한 방식의 외환시장 안정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노후자금’의 딜레마…환율 방어 vs 기금 독립성

국민연금기금의 규모를 고려하면 고환율 시기 연금도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정부 입장이다. 정은경 복지부 장관은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연기금의 규모가 굉장히 커졌는데, 이는 연기금이 환율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연기금도 환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라며 “상호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황 변화에 따라 연금의 운용을 어떻게 할 것인지 한 번쯤은 고민할 시기”라고 말했다.

전문가도 외화채 발행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금융산업실장은 “캐나다 CPPI 등 해외 연기금 사례도 있으며, 해외에서 달러를 조달해 국내 외환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고, 환(換) 관련 ALM(자산·부채 관리)이 수월해진다는 점이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외화채 발행 시 수반되는 이자 비용 부담에 대해서는 국민연금의 압도적인 운용 능력을 강조했다. 이 실장은 “국민연금은 최근 10년간 6.5~7%대, 최근 3년간 두 자릿수 수익률을 기록하는 등 운용을 잘해왔다”며 “역외 채권 발행 비용(국채 금리 기준 3%대 예상) 이상은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어 “향후 환율이 하락하며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 자산 수익률이 떨어지는 잠재적 충격 비용까지 고려하면 장점이 단점보다 많은 옵션”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정부가 외화채 발행 방식을 택할 경우, 환율방어를 위해 국민 노후자금인 국민연금을 동원한다는 비판이 커질 수 있다. 국민연금 기금의 운용 원칙과 독립성을 훼손할 우려도 나온다. 국민연금 운용지침 제4조는 수익성·안정성·공공성·유동성·지속가능성·운용 독립성 6개 원칙을 동등하게 규정한다. 기금 운용은 복지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기금운용위원회의 심의·의결을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 

연금 전문가 단체도 반대 목소리를 냈다. 연금연구회는 지난 9일 긴급 성명서를 내고 “국민연금기금을 환율방어용 쌈지돈으로 탕진해선 안된다”면서 외화채 발행 논의를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연금연구회는 “엄연히 국민연금법에 명시된 보건복지부 장관이 위원장인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가 존재하고 있는데 왜 이 시점에 협의체라는 것을 만들어 국민연금기금 운영방향을 논의하려고 하나”라며 “국민의 노후 소득이며 국민 개개인의 재산권에 해당하는 국민연금기금을 정부나 국가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주머니 쌈짓돈처럼 생각한다면 대한민국 청년들과 미래시대 그리고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은희 기자
joy@kukinews.com
최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