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악산은 횡성 태기산에서 발원된 섬강과 주천강을 사이로 하고 있다. 좋은 산에는 좋은 물이 함께 한다. 치악산 하면 구룡사를 비롯해 행구동, 금대리, 신림 등 주로 알려진 지명이 원주 쪽이어서 그게 치악산 전부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거의 절반이 횡성이고 영월도 포함되어 있다.
진짜 치악산의 가치는 강림을 중심으로 한 동쪽 지역이다. 교통 접근성이 떨어지고 아주 넓은 버덩이 없어 큰 도시가 형성되지 못해서일 뿐 치악산의 진정한 맛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이 동치악이다.
최근 동치악의 가치를 공부하면서 엄청난 역사와 무궁무진한 역사문화 스토리에 더욱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강림이란 동네 이름의 유래가 된 각림사(覺林寺)가 그 중심에 있는데 직역하면 ‘깨달음의 숲에 있는 절’이란 의미다. 1916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개편 당시 지금의 강림(講林)으로 바뀌었다.
삼국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각림사 존재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기록은 고려말 재야 대학자이며 시인인 운곡 원천석(1330~?) 선생이 1393년경에 지은 시사(詩史)에서다. 지금 각림사 터는 흔적조차 없어 겨우 안내판만 우체국 마당 가에 세워져 있지만, 고려말에서 조선 중기까지는 세상이 주목하는 명망 높은 사찰이었다.
각림사 동네에 살던 운곡 선생이 태조 이성계와의 인연으로 태종 이방원을 제자로 한 인연으로 큰 사찰로 중창되면서 조선 중기까지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이다. 1418년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왕위를 선위 받은 아들 세종은 1421년 아버지와 함께 횡성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각림사를 전국 선종 18개 사찰에 포함하고 토지 300결과 승려 150명이 거주하게 했다. 성종은 연간 소금 120석을 내리는 등 왕실의 지원과 보호를 받아오다가 임진왜란 때 안타깝게도 소실되었다.
아버지와 건국한 조선을 완성한 탁월한 능력의 군주 태종 이방원의 정치적 뿌리는 바로 치악산 각림사와 운곡 선생이다. 1379년 13살에 각림사에 와서 3년간 글공부하여 16살에 진사 시험에 2등 합격하고, 이듬해 17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조선 27명의 임금 가운데 유일한 과거 출신인 그는 왕위에 오른 후 강무(講武)를 핑계로 횡성을 5번이나 방문했다. <태종실록> 1417년 7월 5일 두 번째 각림사 방문 때 태종이 내린 명이다.
원주(原州) 각림사(覺林寺)의 중이 사곡(私穀) 2백 석을 근처 제천(堤川) 창고의 쌀 1백 석과 바꾸도록 청하니, 허락하고 승정원(承政院)에 전지하기를,
“각림사는 내가 젊었을 때 놀던 땅이다. 지금도 꿈속에서 가끔 간다. 그러므로 중수하고자 하는 것이지 부처를 좋아하여 하는 것은 아니다. ...”
자신의 고향은 한 번도 찾지 않은 태종이 숭유억불을 국시로 하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찾은 횡성에는 스승 운곡 선생과 맺은 인연이 각림사지를 비롯해 태종대, 노구소, 횡지암, 누졸재 등으로 넘쳐나게 내려오고 있다. 경주 감은사지는 연간 20여만 명의 발길을 끌어모으고 있다. 역사상 가장 강명(剛明) 군주 태종 이방원을 배출한 각림사는 횡성만이 가진 국보급 문화유산으로 우리 횡성의 미래성장동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