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타의 거인들을 무너뜨린 적, 당신의 혈관을 노린다 [기고]

얄타의 거인들을 무너뜨린 적, 당신의 혈관을 노린다 [기고]

가톨릭대학교 순환기내과 임상현 교수

기사승인 2026-01-29 14:45:38
1945년 2월, 얄타에 모여 전후 세계 질서를 재편했던 세 명의 거인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 전쟁의 향방을 결정하던 이 강력한 지도자들은 역설적으로 모두 고혈압이라는 기저 질환 앞에서 무너졌다.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뇌출혈로, 처칠은 반복된 뇌경색으로 생을 마감했다.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그들에게 가장 잔인한 적은 포탄이 아니라, 일상 속에 방치된 자신의 혈관이었다. 

고혈압이 ‘침묵의 살인자’로 불리는 이유는 자명하다. 평소에는 고요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사건’으로 터지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심근경색 환자 중 60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27.4%로 전 연령대 중 1위에 올랐다. 특히 한파가 이어질 때 심혈관 질환 사망 위험이 평상시보다 32.4% 급증한다는 통계청의 분석은 요즘처럼 변동성이 큰 날씨에 혈관 건강이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를 경고한다.

이제 혈관 관리의 패러다임은 ‘치료’에서 ‘지속적 관찰’로 진화해야 한다. 첫째 진료실을 넘어 ‘일상 혈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혈압 진료 과정에서 자주 반복되는 얘기 중 하나가 ‘진료실 혈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의사 앞에서만 혈압이 오르는 ‘백의 고혈압’, 반대로 진료실에서는 정상인데 일상에서는 높은 ‘가면 고혈압’이 생각보다 흔하다. 문제는 이런 경우가 ‘잘 관리되고 있다’는 착각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더 조용한 위험은 밤에 나타난다. 수면 중 혈압이 충분히 떨어지지 않거나 오히려 상승하는 ‘야간 고혈압’은 뇌·심장 사건과 연관성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인은 거의 자각하지 못한다. 결국 관건은 혈압을 한두 번 찍어 보는 ‘점’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이어지는 ‘선’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오늘의 컨디션, 스트레스, 수면, 추위, 음주가 혈압 곡선을 어떻게 흔드는지 알게 되는 순간부터 관리의 질이 달라진다.

둘째, 기술의 진보는 ‘측정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간다. 모두가 일상 혈압의 중요성을 알지만 실천이 어려운 이유는 단순하다. 측정이 불편하고 귀찮기 때문이다. 커프(팔띠)를 감고 압박하는 과정은 통증과 불쾌감을 동반할 수 있고, 밤에 작동하면 수면을 깨워 오히려 혈압을 왜곡시키는 상황도 생긴다. ‘측정하느라 잠을 설쳤다’는 말은 진료실에서 낯설지 않다.

연속혈당측정(CGM)이 채혈 부담을 낮추며 당뇨 관리 문화를 바꿔 놓았듯, 혈압 관리 역시 측정에 따른 번거로움을 줄일수록 더 많은 사람이 더 오래, 더 꾸준히 관찰할 수 있다. 기술의 방향은 결국 하나다. 사용자의 일상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필요한 정보를 더 자주, 더 자연스럽게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최근 주목받는 것이 반지형 웨어러블을 포함한 ‘계속적 혈압 모니터링’이다. 핵심은 거창한 기능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의 문턱을 낮춘다는 점이다. 손가락에 착용하고 지내면서 낮과 밤의 혈압 흐름과 변동성을 비교적 촘촘하게 확인할 수 있다면 그 자체가 관리의 시작점이 된다.

특히 밤은 누구에게나 취약한 시간이다. 우리는 잠든 동안의 혈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고, 변화가 있어도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런데 ‘아무 일 없던 밤’이라고 믿었던 시간에 사실은 혈압이 들쑥날쑥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공포를 키우는 숫자가 아니라, 위험을 보이게 만들어 조기에 대응할 수 있게 하는 기록이다. 기록이 생기면 수면, 음주, 야식, 운동, 스트레스 등 생활 요인과 약물 조정의 효과를 현실적으로 점검할 수 있다.

고혈압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혈압이고, 이 혈압은 자세나 주어진 상황에 따라 변한다. 따라서 중요한 전제가 있다. 어떤 방식이든 혈압 측정은 정확성과 해석이 핵심이며, 웨어러블은 ‘진단의 종결’이 아니라 ‘관찰의 확장’에 가깝다. 수치가 불안정하거나 고혈압이 의심되면 표준화된 혈압계로 확인하고, 필요 시 24시간 활동혈압검사(ABPM) 같은 정밀검사를 통해 치료 전략을 세워야 한다. 좋은 관찰 도구는 어떤 검사가 필요한지, 어떤 습관을 바꿔야 하는지 등을 더 빨리 알려주는 데 도움을 준다.

역사 속 거인들은 기술의 부재로 인해 자신의 혈관이 보내는 비명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기술의 진보에 따른 선택지가 있다. 추위가 깊어질수록, 혈관은 예고 없이 흔들릴 수 있다. 실질적 예방은 조용한 시간의 기록을 확보하는 것이다. 혈압을 일상의 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관리의 주도권은 당신의 하루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