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 슬퍼지네….” 1457년 조선 국왕 중 가장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단종(이홍위)의 이야기가 569년 후 배우 유해진(56)의 눈가를 축축이 적셨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감독 장항준)에서 단종의 유배지 광천골 촌장 엄흥도를 연기한 그는 여전히 작품에 푹 빠져 있는 모양새였다. 특히나 고민했다는 두 사람의 마지막 장면에 만족하는지 묻는 말에는 “잘 해냈다, 못 해냈다기보다 마음을 쏟은 건 맞다. 픽션으로 만든 거지만 실제 그랬던 분이지 않나. 어린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며 울컥하기도 했다.
유해진은 앞서 언론시사회에서도 완성된 작품을 처음 보고 눈물을 쏟았다. 그는 최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관련 이야기가 나오자 “지가 한 건데 많이 울었다”며 머쓱한 듯 웃어 보였다. “단종이 더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고 하고 흥도가 그 사람에 저도 있냐고 묻는데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가벼운 슬픔이 아니에요. 그래서 몇 번을 봐도 더 슬픈 것 같아요. 단종이 안 됐다는 생각이 너무 커요. 박지훈 배우도 많이 울었어요. 눈이 시뻘겋더라고요.”
‘왕과 사는 남자’는 과거 기록에 따르되 예상치 못한 시각으로 모두 아는 역사를 극적으로 풀어낸다. 영화 속 단종은 결코 유약하지 않다. 왕권을 되찾아 오는 데 실패하지만 끝까지 휘둘리지 않고자 발버둥 친다. 죽음의 방식을 스스로 정한 것도 궤를 같이한다. 단종은 사약 대신 엄흥도가 잡아당기는 줄에 생을 마감하기를 택한다. 유해진은 이 장면을 촬영할 때를 회상하며 “어떻게 계산할 수 없는 연기였다”고 혀를 내둘렀다. “처음 받아봤을 때는 큰 숙제였어요. 한다고는 했는데 어떻게 표현하나 했어요. 그리고 줄을 잡아당겼을 때 진동이나 움직임이 있을 텐데 감히 예측을 못 하겠더라고요. 마음만 갖고 찍었어요. 그분(단종)만 생각하면 그냥 (감정이) 나왔던 것 같아요.”
유해진이 이처럼 단종만 떠올려도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극중 단종으로 분했던 박지훈의 역할도 컸다. 첫인상은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아이돌’. 걱정됐지만 촬영하자마자 시름은 싹 가셨다. “초반에 에너지 있는 장면을 같이 찍었는데 대단하더라고요. 저도 자극을 받았죠. 애가 붙임성이 있진 않아요. 그런데 슬 와서 스며들어요, 부담 없이. 작품에 대한 얘기부터 살아가는 얘기까지 차차 지훈이를 알게 됐는데 진득하니 좋은 사람 같더라고요. 가볍지도 않고요. 그 부분이 신뢰가 갔어요. 그러면서 정도 두터워졌고요. 다른 배우랑 했어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서 마음이 더 우러난 것 같아요.”
인간 박지훈에게 정을 느꼈다면 배우 박지훈과는 ‘공명’했다. 유해진은 이미 많은 이가 언급하는 박지훈의 눈빛에 감탄했다. “눈빛이 진솔하기도 하고 척하는 거 같지 않아서 좋았어요. 우리가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예를 들면 내가 대사를 하다가 울컥해서 딱 쳐다봐요. 그러면 걔가 맨눈이었는데 눈가에 금방 눈물이 맺혀요. 제가 그걸 또 받고요. 연기가 사실 서로 주고받는 거잖아요. 사실 연기가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예요. 누가 ‘많이 힘들겠다’ 하면서 울면 상대도 얘기하면서 눈물이 확 맺히는 것처럼요. 관계가 그랬어요.”
여기에 유해진은 극의 웃음까지 책임져야 했다. 진작 정평이 난 그의 코믹 연기지만 ‘왕과 사는 남자’에서 펼친 생활 연기는 또 한 번 기대를 뛰어넘는다. “쉿.” 그는 비결을 묻는 말에 능글맞게 입술 위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활에 침을 바르고 이런 게 아무것도 아닌 거 같은데 선수 같아 보여요. 무슨 영향을 주겠나 싶지만 흥도에게는 오랜 세월 그렇게 해왔던 버릇이고 믿음인 거예요. 그 사람의 시그니처인 거죠. 이렇게 찾아내는 게 (인물에게) 생명을 주는 것 같고 재밌어요. 또 오래 연기하면서 작성하는 게 있어요. 시간 순서대로 찍는 게 아니니까 플랜을 짜놓고 연기하기 편하게 정리하는 거죠. 이건 어디 가서 얘기하시면 안 됩니다(웃음).”
‘왕과 사는 남자’는 4일 스크린에 걸린다. 설 특수를 노린 개봉 시기로 풀이된다. 명절 연휴에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사극이라는 점, ‘국민 배우’ 유해진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흥행이 점쳐진다. “여러 세대가 다 좋아할 만한 작품이 오랜만에 나와서 기대가 있어요. 이런 작품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관객이 많이 찾아와야 한다’ 같은 이유도 있겠지만 가족이 같이 볼 수 있으면서도 가볍지 않은 작품이 많지 않았어요. 극장 가는 맛이 생길 수 있게 만들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만에 하나 안 된다고 하더라도 감독님도 지훈이도 마을 사람들도 너무 좋아서 행복한 작품이었어요. 좋은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