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새롭게 만난 마을 사람들과의 삶이 어쩐지 나쁘지 않다. 그렇게 소소한 행복과 생의 욕구를 찾아가는데 이를 지켜보기가 만만치 않다. 환하게 웃을수록 가슴이 미어지고 눈시울은 뜨거워진다. 끝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말에 다다를 때까지 지루하지 않다. 타고난 이야기꾼 장항준 감독의 필력, 진심을 다한 배우 유해진과 박지훈의 열연이 관객을 힘있게 끌고 간다.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 이홍위의 마지막을 조명한 ‘왕과 사는 남자’다.
여러모로 놀라운 작품이다. 이미 스포일러를 깔아놓고 시작하는 판인데 반전을 거듭한다. 한 번쯤 미디어나 서적에서 접해봤을 단종의 모습은 없다. 집채만 한 호랑이가 자신을 덮쳐도 꼿꼿하게 활시위를 당기고, 짧게나마 동고동락한 광천골 사람들을 지키고자 분투를 벌인다. 질 수밖에 없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뛰어드는 그는 결단코 나약하지 않다. 그리고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숨어 살았다고 짧게 기록됐지만 누구도 기억하지 않았던 엄흥도의 존재를 전면에 내세운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낸 장항준 감독의 영리함이 돋보인다.
또 다른 반전은 박지훈이다. 앞서 ‘약한영웅’ 시리즈로 탁월한 캐릭터 소화력과 감정 표현을 증명해 낸 그지만, ‘왕과 사는 남자’의 박지훈은 가히 경이롭다. 그의 말대로 ‘대본 속 상황에 들어가려고 많이 노력한’ 기색이 확실히 엿보인다. 그가 아닌 이홍위는 떠올리기 힘들 만큼 단종 그 자체다. 탁월한 장면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전개 내내 인물로서 존재하는 그를 보고 있자면 ‘이렇게 잘하는 배우였나’라는 질문마저 어리석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늘 호평받았던, 박지훈만의 특별한 눈빛이 있다.
엄흥도로 분한 유해진은 늘 그랬듯 잘하겠거니 하는 예상을 자비 없이 뒤엎어 버린다. 그는 잘하는 것을 더 잘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또 잘한다. ‘왕과 사는 남자’가 관객을 웃겼다 울렸다 한다는 평이 적확하다. 이홍위의 끝을 함께하는 광천골 촌장 엄흥도가 사실상 타이틀롤이고, 그가 웃겼다 울렸다 하는 역할을 도맡았으니 문자 그대로다. 유배자를 기다리며 들뜬 엄흥도의 밤중 독백이 화려한 스탠딩 코미디 쇼라면, 엄흥도가 사약을 받은 이홍위를 위해 줄을 힘껏 당기는 신에선 그의 오르내리는 안면 근육만 봐도 눈물을 쏟게 된다.
유지태 역시 전에 없던 얼굴과 풍채로 스크린을 장악한다. 그는 새로운 느낌의 한명회를 만들고자 한 장항준 감독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낸 연기를 펼친다. 관자놀이에 테이핑을 해 소름 끼치게 매서운 눈초리를 만들고,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거구로 보이려고 몸을 더 키웠다. 이견 없는 연기력에 철저히 준비한 외형까지 힘을 실으니 역시 비견될 자가 없다. 특히 아들 태산(김민) 대신 자신의 장을 치라고 절규하는 엄흥도 앞에 한명회가 가림막을 거칠게 뜯어내며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그 위용이 대단하다.
다만 엉성한 호랑이 CG(컴퓨터그래픽), 오래전 대하 사극을 연상시키는 궐내 시퀀스와 편집점은 아쉽다. 뻔할 것 같았던 전개와 이름난 배우들의 캐릭터 표현이 신선한데 정작 연출이 쿰쿰한 느낌을 풍기니 더 유감이다. 그럼에도 봐야 하는 이유가 보지 말아야 할 이유보다 많은 작품임은 틀림없다. 설 연휴, 배우들을 믿고 이야기의 흐름에 눈과 귀를 맡긴다면 훌륭한 시네마틱 경험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4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상영시간 117분. 쿠키영상 없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