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투자 시장에서 기업의 실질 가치와 무관하게 밸류에이션이 급등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과잉 유동성 속에 형성된 고평가 위험이 전환사채(CB) 등 메자닌 상품을 통해 개인투자자에게 이전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증권사의 자금 조달은 늘었지만 투자처는 제한되면서, 적정 가치에 기반한 투자 판단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10일 벤처투자업계 관계자 A씨는 최근 한 중견기업 메자닌 투자 검토 사례를 통해 현 시장 분위기를 전했다. A씨는 해당 기업의 매출과 실적, 동종 업계 밸류에이션 등을 감안해 적정 기업가치를 약 2000억원 수준으로 산정하고 투자를 검토했다. 그러나 주관 증권사가 제시한 최종 기업가치는 6000억원에 달했다. 사업 내용이나 실적에 의미 있는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짧은 기간에 기업가치 평가만 세 배로 상향 조정된 셈이다.
A씨는 결국 투자를 철회했다. 그는 “이 수준의 밸류에이션에서는 기관투자자 입장에서 기대할 수 있는 수익 구조가 성립하기 어렵다”며 “실적과 사업 전망에 비해 너무 비싼 가격이 붙은 만큼 나중에 더 높은 가격에 매각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야만 투자가 가능한 시장”이라고 말했다.
가치 급등 투자, 개인 자금이 메우는 경우 늘어
메자닌 투자는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 채권과 주식의 성격을 동시에 가진 증권에 투자하는 방식이다. 채권 이자를 받으면서도 향후 주가 상승 시 자본이익을 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저금리·유동성 국면에서 인기를 끌어온 상품이다.
해당 기업의 자금 조달은 전환사채 발행을 통해 이뤄졌고, 이 물량 상당 부분은 증권사 프라이빗뱅커(PB) 채널을 통해 개인 고객에게 판매된 것으로 알려졌다. 기관투자자들이 ‘밸류에이션 부담’을 이유로 참여를 주저한 구간을 개인 자금이 메우는 사례가 늘어나는 모습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개인투자자가 마주하는 계약 조건이 구조적으로 불리해질 소지가 크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CB에는 주가 하락 시 전환가액을 낮춰주는 리픽싱(Refixing) 조항이 포함된다. 하지만 이미 시장 참여자들이 부담스럽다고 보는 수준의 높은 가치(예컨대 6000억원)를 기준으로 발행된 경우, 주가가 조정되면 전환가액이 빠르게 최저 한도까지 내려가 손실 방어 효과가 제한적될 수 있다. 상장사 CB의 경우 통상 최초 전환가액의 70%까지 리픽싱을 허용하는 구조가 많다. 일단 하한에 도달하면 이후 주가가 추가로 하락하더라도 전환가액 조정 여지는 사실상 사라진다. 예를 들어 최초 전환가가 1만원인 CB가 7000원까지는 조정되지만, 그 이후 주가 하락분은 고스란히 투자자의 손실로 남는 구조다.
반면 주가가 일정 수준 이상 상승했을 때 전환가액을 다시 올리도록 하는 ‘상향 리픽싱’ 규제는 상장사 공모와 사모 CB를 중심으로 제도화돼 있다. 비상장사나 구조가 복잡한 비공개 딜에서는 적용되지 않거나 투자자와의 개별 협상에 맡겨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 경우 초기 밸류에이션이 높게 책정된 상황에서는 하락 구간에서의 손실 방어 장치가 제한적인 반면, 상승 구간에서는 조기 상환·콜옵션 등으로 수익이 제약되는 등 개인에게 불리한 보상 구조가 형성될 수 있다.
증권사도 자체 리스크 부담 증가
코스피 5300선 돌파와 생산적 금융 기조 속에 종합투자계좌(IMA)와 발행어음 사업자가 늘어나면서 증권사 창구에는 개인 자금이 빠르게 몰려들고 있다. 한 PB는 “예·적금 대신 맡기려는 신규 자금이 워낙 많아 종일 응대를 하느라 이전 고객의 전화는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증권사 입장에서도 최근의 유동성 확대가 마냥 반가운 상황은 아니다. 예·적금 이탈 자금과 투자 대기 자금이 동시에 유입되면서 운용해야 할 자금 규모가 급격히 불어나고 있어서다. 확보한 자금을 장기간 대기성 자산으로 둘 수 없는 구조상, 제한된 벤처·메자닌 투자처를 놓고 경쟁이 심화되면 밸류에이션이 과도하게 높아지고, 그 부담이 증권사 자체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 같은 유동성 확대에는 정책 요인도 작지 않게 작용했다. 금융당국이 생산적 금융을 정책 기조로 내세우며 증권사의 기업금융·투자은행(IB) 기능을 강화하는 가운데, IMA와 발행어음 사업 인가를 받은 증권사가 늘어나면서 증권사의 만기구조가 긴 조달 자금이 빠르게 증가했다. 정책 취지대로라면 해당 자금은 벤처나 혁신기업 등 모험자본이 필요한 곳으로 흘러가야 하지만, 실제 투자처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자금이 일부 인기 섹터나 비공개 메자닌 딜에 과도하게 쏠리며 가격 왜곡을 키우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전문가들, 제도적 보완 필요 지적
전문가들은 단순한 리스크 관리 원칙을 넘어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예를 들어 증권사가 인수한 메자닌 물량의 일정 비율을 자기계정으로 일정 기간 보유하도록 해 자기 책임을 강화하거나, 고위험 메자닌 상품에 대한 개인 투자 한도·적합성 요건을 보다 엄격하게 설정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판매 단계에서 투자위험, 밸류에이션 산정 방식, 리픽싱 구조 등에 대한 정보 제공을 강화하는 것도 실질적인 안전장치로 꼽힌다.
한 VC 업계 관계자는 “기업의 경쟁력이나 사업 성과가 뚜렷하게 개선되지 않았는데도 밸류에이션만 높아지는 사례가 최근 눈에 띄게 늘었다”며 “현재 구조는 풍부한 유동성이 전제돼야만 유지될 수 있는 시장”이라고 말했다.
이어 “생산적 금융이라는 명분이 취지와 달리 정보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개인투자자에게 더 큰 부담을 지우는 방향으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며 “유동성 흐름이 둔화될 경우 그 부담이 누구에게 돌아갈지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와 관련해 한 증권사 관계자는 “PB를 통한 메자닌 상품 판매 역시 고객의 투자 성향 파악과 위험 고지를 거쳐 이뤄지고 있으며, 기관 및 전문투자자도 상당한 비중으로 참여하고 있다”면서 “모든 위험이 개인에게 일방적으로 전가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