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뭇 여성들은 배우 박정민(39)을 보고 지독하게 사랑했던 전 남자친구를 떠올렸다. 가수 화사와 꾸민 ‘굿 굿바이’(Good Goodbye) 무대가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박정민은 계획한 듯 절절한 순정남 박건으로 돌아왔다. 박건은 사랑하는 이를 구할 수만 있다면 절대적인 이념도 신념도 저버릴 수 있다. 죽고 싶진 않다. 다신 그를 혼자 두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의 덕을 본 건지 섣불리 말할 순 없지만, 박건으로 분한 박정민은 또 한 번 여심을 뒤흔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이 영화를 찍으면서 멜로 연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단다. 지난 9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그에게서 이같이 여긴 이유를 소상히 들어봤다.
지난 11일 개봉한 ‘휴민트’는 비밀도, 진실도 차가운 얼음 바다에 수장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이들이 격돌하는 이야기다. 박정민은 극중 북한 국가보위성 조장 박건 역을 맡아. 국정원 요원 조 과장으로 분한 조인성과 북한 식당 직원 채선화로 변신한 신세경과 호흡을 맞췄다. 박건의 옛 연인이자 조 과장의 정보원인 채선화는 이들 사이에서 묘한 텐션을 자아내며 박건의 감정과 상황을 극한으로 치닫게 하는 인물이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는 아예 그런 낌새를 못 느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찍은 분량이 조금 있는데 그때 무드가 그냥 액션 영화는 아닌 것 같았어요. 조명이라든지 톤 앤 매너가 그랬어요. 이걸 가장 크게 느꼈던 신은 저랑 (신)세경 씨의 신이 아니라 (조)인성이 형과 세경 씨가 호텔에서 대화하는 신이었어요. 분위기가 오묘해서 왕가위 영화 보는 느낌도 들더라고요. 저는 몸의 대화를 하는 신이 많아서 사랑하는 한 사람을 구출하기 위한 마음에 집중했고, 한 사람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휴민트’는 멜로와 액션이 절묘하게 배합된 복합 장르 영화다. 무엇이 우세하다고 말하기 쉽지 않다. 멜로를 책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박정민조차 그렇게 느꼈다. “멜로라고만 정해져 있으면 서로 준비돼서 출발했을 텐데 둘이 무슨 사이인지 어떻게 된 건지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 감정들을 약간 튀어나오게 해야 했어요. 멜로적으로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 신은 식당 뒤에서 선화와 만나는 장면이었어요. 거의 유일하게 단둘이 만나는 거였는데 저뿐만 아니라 모두 촉각을 곤두세웠었어요. 인성이 형도 오셔서 ‘좋아, 좋아’ 귓속말하고 가셨어요.”
박건은 여러모로 쉽지 않은 배역이었다. 작정하고 멋있어야 하는 캐릭터인 만큼 조명까지 영리하게 활용해야 했다. “류승완 감독님이 항상 제가 조명을 못 찾아 먹는다고 답답해 하셨어요. ‘밀수’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박건은 정말로 조명을 찾아 먹어야 하는 인물이라서 이걸 계속 유념하려고 했었어요. 조명이 여기 있으면 어디까지 들어가야 그림자가 얼굴 반 정도 걸치고, 이런 것들요. 카메라와 조명과 연기하는 것들이 다른 영화보다 훨씬 많았어요.”
‘화사의 남자’에 이어 ‘신세경의 남자’까지 수식어를 추가하게 됐지만, 어쩐지 박정민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켜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세상은 늘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이상한 선물을 주기도 하잖아요. 그러다 말겠지 해요. 연락이 뜸하던 친구들도 ‘정민아, 드디어 네가 떴구나’ 해요. 어디까지 떠야 떴다는 건지, 그 전엔 뭐였던 건지(웃음). 사실 저는 살면서 노리는 것들을 얻은 적이 없어서 어느 순간부터 노리지 않았어요. 목적이 없는 삶을 산다고 표현해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선택하는 순간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때 오는 허탈감이 너무 커서 과정에서 오는 행복을 찾을 수 없어요. 그렇게 어딘가로 달려가는 게 저는 너무 슬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