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확산을 뒷받침해 온 미국의 배출 규제 체계가 변곡점을 맞았다. 북미를 핵심 시장으로 삼아 전동화 투자를 확대해 온 국내 완성차와 배터리 기업들도 전략 점검에 나선 분위기다. 정책 변화가 실제 수요 흐름에 어떤 영향을 줄지 업계의 시선이 쏠린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차량 온실가스 규제의 법적 근거였던 ‘위해성 판단(endangerment finding)’을 폐기한다고 지난 12일(현지시간) 밝혔다. 위해성 판단은 지난 2009년 오바마 행정부 당시 도입됐다. 차량 배출가스 규제와 연비 기준 강화의 토대가 돼 왔다.조치가 시행되면 미국의 차량 배출 기준은 완화될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규제 완화가 신차 가격 인하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런 트럼프의 주장에 환경단체와 일부 주 정부는 소송 방침을 밝혔다. 제도 변경 범위와 시점은 법적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이다.
현대차·기아, 하이브리드 자동차로 ‘유연 대응’ 가능
북미 시장은 현대자동차와 기아의 핵심 판매 지역이다. 두 회사는 전기차 전환 전략도 북미를 중심으로 확대해 왔다. 현대차그룹은 미국 조지아주에 전기차 전용 공장을 구축하며, 전용 플랫폼 기반 모델을 현지에서 직접 생산하고 있다.
배출 규제가 완화될 경우 완성차 업체들이 전기차 판매 비중을 빠르게 높여야 하는 정책적 부담은 줄어들 수 있다. 다만 두 회사는 이미 글로벌 차원의 전동화 계획을 공표한 상태다. 유럽연합(EU) 등 주요 시장은 기존 탄소 규제를 유지하고 있다. 북미 정책 변화가 곧바로 전략 수정으로 이어질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전동화 전략을 유지하더라도 시장 상황에 따라 생산 차종과 물량을 조정하는 유연 대응은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지난 18일 현대차는 미국 전기차 생산 거점인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에서 혼류 생산 체제를 도입해 하이브리드 차종을 추가로 생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연간 생산 규모도 30만대에서 50만대로 확대할 방침이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현대차는 미국 내 생산 기반을 갖추고 있고 수요에 따라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비중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구조”라며 “단기적으로는 시장 상황을 보며 유연하게 대응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배터리 3사, 기존 하방 흐름 지속
북미 전기차 시장은 국내 배터리 3사의 핵심 수요처다.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는 완성차 업체와 합작해 미국 현지 생산 거점을 확대해 왔다. 일부 공장은 이미 가동 중이며, 추가 증설도 진행되고 있다.
전기차 판매가 둔화될 경우 배터리 출하량 증가세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전기차용 배터리는 3사의 매출 대부분을 차지하는 핵심 사업이다. 판매 속도가 조정되면 공장 가동률과 수익성에도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번 조치가 배터리 3사에 큰 위협은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박철완 서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북미 전기차 시장의 둔화는 이미 시작된 흐름”이라며 “IRA 보조금 일몰과 완성차 업체들의 투자 조정이 먼저 나타난 상황에서 이번 조치가 추가적인 구조 변화를 만들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업계 내부에서도 신중한 분위기다. 한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완성차 업체들의 전동화 전략이 일부 조정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이런 경우 북미 전기차 보급 속도가 둔화될 수 있는 만큼, 북미 공장 ESS 라인 전환 등에 속도를 내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검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규제보다 더 큰 변수는 관세
전문가들은 이번 규제 완화 자체보다 관세 정책과 글로벌 가격 경쟁이 더 큰 변수라고 보고 있다. 이 연구위원은 “관세 인상 폭에 따라 수익성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할 수 있다”며 “현재는 관세나 중국 업체의 저가 차량 공세로 인해 가격 경쟁이 심화된 국면”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정책 변화보다 중요한 것은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의 경쟁력”이라며 “전기차 배터리 점유율 하락을 멈추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말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하이브리드 차량 판매 증가세가 이어지고 있다. 전기차 전환 속도가 조정될 경우 하이브리드가 완충 역할을 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다만 전문가들은 정책 변화보다 글로벌 수요 흐름과 가격 경쟁이 향후 실적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북미 시장의 변동성이 커진 만큼 완성차와 배터리 업계 모두 생산 비중과 투자 속도를 유연하게 조정하는 대응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