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기 침체와 중국발 공급 과잉이라는 이중고 속에 국내 석화업계는 고사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NCC(나프타분해공장) 가동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가운데, 업계는 범용 제품 생산 축소하고 고부가가치 신소재 전환에 사활을 걸고 있다. 다만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는 한 체질 개선은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26일 석유화학 업계 및 학계에 따르면, 국내 주요 석화사들은 중국의 저가 공세에 대응해 고기능 소재인 스페셜티 비중 확대를 추진 중이다. 그러나 신규 물질 개발 초기 단계부터 요구되는 막대한 비용과 복잡한 인허가 절차가 기업의 투자 속도를 늦추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석화업계의 생존 전략으로 꼽히는 스페셜티 전환의 핵심은 R&D(연구개발)이다. 범용 제품은 중국 저가 공세에 취약하지만, 스페셜티는 맞춤형 고기능 소재로서 기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LG화학, SK지오센트릭 등 주요 기업들도 NCC 감산 이후 스페셜티 라인 확대를 추진 중이며, 업계 내부에서는 “신규 물질 개발 없는 사업 전환은 불가능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분위기다.
문제는 제도적 장벽이다. 화평법과 화관법이 존재하는 한 연구 개발 과정에서 신규 물질 개발 시 화평법 등록과 화관법 인허가가 초기부터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요구한다. 특히 지난 2025년부터 시행된 화평법 개정안에 따라 1톤 미만 신규 물질의 등록 부담은 일부 완화됐지만, 연간 1톤 이상의 신규 화학물질은 여전히 방대한 유해성·노출 자료 제출이 필수적인 상황이다. 자료 보완과 공급망 협의가 반복되면서 제품 출시까지 수년이 걸리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는 구조조정과 사업 재편의 속도를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분석이다.
화평법과 화관법은 유해 화학물질로 인한 건강·환경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2015년 본격 시행됐다. 유럽연합(EU)의 REACH 제도를 벤치마킹해 기업이 정보를 직접 생산·등록하도록 함으로써 사전예방적 안전관리 체계를 구축하고, 동시에 화학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제도 이식 과정에서 산업 진흥이라는 축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범용 소재를 다뤄온 석화 업체들이 스페셜티로 전환할 때 화평법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을 것”이라면서 “유럽 리치법 1조에는 환경 보호와 국민 안전 뿐 아니라 화학산업 진흥과 유통망 확충이 포함돼있지만, 한국 화평법에는 ‘산업 육성’ 관점은 빠져있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데이터 종속’ 문제도 업계의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국내 독성 실험 인프라가 부족한 탓에 우리 기업들은 등록 기준을 맞추기 위해 유럽 기업으로부터 수억 원대 LoA(데이터 사용권)를 구매하게 된다. 일부 환경·인체 유해성 항목은 국내 시험기관이 전무해 해외 데이터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국내 R&D 예산이 유럽 화학 대기업의 주머니를 채워 주는 이른바 ‘데이터 통행료’로서 증발한다는 것이다.
반면 기후에너지환경부는 현 제도 운용을 통해 부담 완화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2025년 화학안전 정책 포럼에서 환경부는 “과도한 수준의 시설 개선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환경부는 “고가의 직접 시험 보고서가 아니더라도 큐사(QSAR)나 리드어크로스(Read-across) 등 비시험 방법으로 얻은 유해성 예측 자료의 인정 범위를 넓히고, 화학물질을 신고할 수 있는 길을 대폭 열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업의 실질적 부담을 완화 해주기 위한 기조는 제도 운영 방향 반영돼있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양측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는 가운데, 학계에서는 산업 구조 재편과 함께 규제 패러다임 역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한다.
이상준 서울과기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위험을 완화하는 방법이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며 “유럽 역시 규제를 완화한 사례가 있듯, 규제 개편 논의 과정에서 투 머치(Too Much) 규제가 아닌 신산업 발전을 고려한 최적 지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