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력'(감독 연상호)에서 석헌(류승룡)이 판타지를 담당한다면, 루미(심은경)는 무거운 현실의 축을 쥐고 있다. 어린 시절 가출한 아빠에 관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루미는 상가 재개발 과정에서 용역깡패들에게 엄마를 잃고 그들에게 지독하게 맞서 싸운다. 최근 영화 개봉을 앞두고 서울 팔판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심은경은 "처음 '염력' 시나리오를 봐도 사실 영화의 비주얼은 좀처럼 상상이 안 됐다"고 털어놨다. 초능력을 쓰는 아빠, 그리고 싸우는 딸의 이야기에 출연을 결정한 것은 오로지 연상호 감독에 관한 믿음 덕분이다.
"시나리오를 보고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감독님하고 많이 얘기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루미 캐릭터를 어떻게 그려나갈 것인가 상의도 했고, 레퍼런스도 많이 참고했죠. 미키 루크가 출연한 '레슬러'가 많은 참고가 됐어요."
루미는 아빠 없이 엄마와 둘이 살아가기 위해 억척스러워진 아이다. 낡은 남평상가에서 소문이 날 정도의 치킨집을 하면서 TV에도 스스럼없이 출연하고, 용역 깡패들에게 맞서기 위해 새벽에도 가게에서 잔다. 어찌 보면 배우 심은경이 살아온 삶의 궤적과는 겹치는 부분이 없어 가장 이해가 어려운 캐릭터일 수도 있다.
"시나리오를 보고 감이 잘 안 왔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에요. 대사부터 경험까지 제게는 없는 부분이었거든요. 하다못해 치킨도 한 번 튀겨본 적 없는데 이걸 어떻게 맛깔나게 표현할까? 싶은 고민이 있었어요. 사실 '레슬러' 말고 '생생정보통'같은 저녁 시간대 프로그램도 열심히 봤죠. 저는 매 작품마다 캐릭터를 제 것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사실 루미를 표현하면서 개성을 보여주기보단 그저 평범하면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게 가장 어렵더라고요."
루미 같은 극적인 상황에 처해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극이 진행될수록 루미의 어떤 부분은 심은경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자라면서 사춘기의 고민들이 덮쳤던 순간이 분명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감정과 그에 대한 루미의 감정이 극명히 대조되는, 이른바 '넥타이 염력 장면'에서 심은경은 "나에게도 아주 중요한 장면이었다"고 말했다. 루미의 마음이 솔직히 드러나는 장면이자 아빠에 대한 상처를 내보이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루미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생각을 놔 버리고 연기하면 맹탕이 돼 버릴 거예요. 그래서 '염력'에서는 본능적으로 연기했다기보다는 기술적으로 고려를 많이 했어요. 뭐랄까, 한 장면을 연기하기 전 내 안에서 루미의 감정을 차차 고조시켜나가서 어떻게 터트릴까 하는 과정을 미리 그려놓고 작업했달까요. '평범'이라는게 참 미묘해요. 그렇죠? 잘못 연기하면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워 보이기 십상이니까요."
"저는 시대에 따라서 생각을 자유롭게 달리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어요. 세상은 끊임없이 바뀌고 달라지는데, 그 모든 걸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된 사람이 어른 같거든요. 관조적인 사람도 제가 되고 싶은 이상형이에요. 최근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고 있는데, 그 사람이 제가 생각하는 그런 어른인 것 같아요. 하하. 뭐 다를 수도 있겠죠. 책만으로 그를 다 알 수는 없으니까요."
'염력'은 오는 31일 개봉한다.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