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시원’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tvN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본 사람들은 “현빈의 전전 부인”이란 소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모르면 ‘서울대 출신 신인 여배우’라고 설명했다. 현재 이시원이란 배우의 표면을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는 수식어다.
최근 쿠키뉴스 본사에서 이시원을 만난 이후엔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한 배우라고 느꼈다. 이시원은 논리 정연한 언어와 비유적 표현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할 줄 알았다. 생각을 부풀리거나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한 편의 강연을 듣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이시원은 지난 한 해를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과 함께 보냈다. 안길호 감독과 전작 SBS ‘미세스 캅’과 ‘내 사위의 여자’를 함께한 인연으로 부름을 받았다. 주인공의 전 부인도 아닌 전전 부인인데도 큰 역할이었다. 과거 스토리가 많고 힘든 일이 계속돼 연기하기 쉽지 않은 인물이었다. 자신을 불러준 감독님을 실망시키면 어떡하나 부담을 느꼈다. 이시원은 먼저 스스로에게 이수진 역할을 설득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작가님도 감독님도 이수진 캐릭터가 너무 어렵다고 하셨어요. 많은 감정과 사연이 얽혀있어서 등장할 때마다 연기하기 쉬운 장면이 없었죠. 이 캐릭터로 시청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선, 먼저 저 스스로를 설득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수진의 과거를 정리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작가님은 이수진을 ‘예쁜 칼’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수진이는 모든 걸 다 가진 여성이잖아요. 지적이면서 참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불행이 닥칠 수밖에 없는 양면성이 있어요. 저도 수진이를 불안하고 히스테릭한 면이 숨어있는 인물이라고 봤어요. 스트레스가 극심한 상황에서 언제든 폭발할 수 있겠다 싶었죠. 수진이의 그런 점들을 잘 표현하려고 했어요.”
이시원의 말처럼 이수진은 양면성이 있는 인물이다. 유진우(현빈)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도 아니고 극의 전개를 방해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전 남편의 친구인 현재 남편을 사고로 잃는 기구한 사연을 갖고 살아간다. 드라마에서도 홀로 싸우는 캐릭터다. 시청자들의 응원을 받는 것도 아니다. 이시원은 그래서 더 이수진의 편에 서 있고 싶었다고 했다.
“수진이는 예쁨 받기 어려운 캐릭터예요. 드라마 안에서도 수진이 편이 없어요. 세상에 떠도는 유언비어와 사람들의 비방, 시아버지의 모욕적인 발언 등 여러 가지가 수진이를 괴롭혔죠. 드라마가 방송된 이후에도 수진이를 응원하는 시청자는 많지 않았고요. 전 연기하는 배우로서 세상 어느 누가 수진이를 욕해도 저만은 수진이의 편이 되어주고 싶었어요. 수진이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고 공감해주고 싶었죠. 수진이의 상황이 되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저에게도 힘든 일이었어요. 하지만 수진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면 그 이전의 이시원에 머물렀을 것 같아요. 이번 드라마를 하면서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 것 같아요. 제 자신을 더 여는 기회가 된 거죠.”
이시원은 상대적으로 데뷔가 늦은 배우다.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진화심리학 석사까지 마친 후 연기에 뛰어들었다.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싶지만 이시원은 생각은 반대였다. 서울대를 졸업한 것도 연기 이전의 경력에 불과하다는 얘기였다.
“모든 배우들이 다 그렇겠지만 연기를 시작한 이유는 ‘연기하는 게 좋아서’예요.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느끼고 제 생각으로 표현하는 걸 좋아했어요. 처음엔 화가가 꿈이었는데 부모님이 화가는 취미로도 할 수 있으니 이왕이면 공부를 더 해보라고 하셨어요. 처음 꿈을 포기하고 나서 뭘 해야 할지 방황했던 것 같아요.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야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확신이 섰어요. 그게 동아리 활동으로 하고 있던 연기였고요. 모든 배우들이 배우가 되기 전 스토리가 있잖아요. 어떤 배우들은 요리를 했거나 사진을 찍기도 하고 운동을 했던 분들도 있죠. 저는 그냥 공부를 잘했던 거예요. ‘서울대’란 수식어는 배우가 되기 전까지 저의 스토리고 저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그걸로 주목받을 수 있지만, 배우로서 충실히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희석되어 갈 것 같아요.”
이시원은 배우로서 현재 위치를 ‘구름판’이라고 설명했다. 뜀틀로 도약하기 전에 밟은 구름판을 이제 막 밟았다는 얘기다. 차기작이 궁금한 배우가 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지금의 전 뜀틀을 뛰기 직전 구름판에서 도약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누군가 뜀틀을 뛰어넘는 순간을 보잖아요. 하지만 사실 전 멀리서부터 천천히 달려오고 있었거든요. 저를 지금 단계로 만들어준 게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고 생각해서 저에겐 참 중요한 의미가 있죠. 예전엔 내가 뛸 수 있을까 고민했다면, 이젠 어떻게 뛰어야 하냐를 고민해요. 그래도 두려워하지 않고 다양한 역할에 계속 도전하면서 살아보고 싶어요. ‘이시원이 이런 역할도 할 수 있네’, ‘이시원이 다음엔 어떤 역할을 맡을까’ 하고 시청자들이 차기작을 궁금해 하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 사진=박태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