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세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세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4-16 00:00:00

공식적인 이름은 성 베드로의 가톨릭교회(Hohe Domkirche Sankt Petrus)인 이 교회를 흔히 쾰른대성당(Kölner Dom)이라고 부른다. 쾰른대교구의 대주교좌 성당으로, 북유럽에서 가장 큰 고딕양식의 교회이며, 157m 높이의 첨탑 2개는 울름대성당의 첨탑에 이어 2번째로 높다. 라인강에서 250m 떨어진 높이 17m의 언덕 위에 서 있다. 쾰른 대성당의 길이는 145m, 서쪽 정면의 폭은 62m이며, 가장 긴 남북측랑의 폭은 75.2m이다. 중랑의 높이는 43.5m이며, 탑의 높이는 157m이다. 

쾰른의 중세 건축가들은 동방박사의 유물을 보관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위한 예배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웅장한 교회건물을 짓기로 했다. 1248년에 시작한 대성당의 건설은 1473년에 중단됐다가 1840년대에 다시 시작해 1880년에 처음의 계획대로 완료됐다. 대성당이 들어선 자리는 로마제국 시절 메르쿠리우스 아우구스투스(Mercurius Augustus)가 옛날 곡물창고를 헐고 세운 로마 신전이 있던 장소이다. 

4세기 무렵 쾰른의 초대주교 마테르누스(Maternus)는 이곳에 ‘가장 오래된 성당’이라고 알려진 기독교 건물을 세웠다. 7세기 무렵에는 지금의 대성당 동쪽 끝부분에 세례당이라고 하는 별도의 건물이 있었지만, 9세기 무렵에 철거하고 오래된 성당이라는 이름의 2번째 성당을 지었다. 현재의 대성당의 유물을 발굴하던 가운데 오래된 성당의 유적에서 6세기 무렵의 무덤이 발견됐다. 부장품으로 화려하게 꾸민 소년과 롬바르드의 왕녀 위시가드(Wisigard)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164년 쾰른 대주교인 다셀의 라인알트(Rainald von Dassel)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레데리크 바르바로사(Frederick Barbarossa)가 이탈리아 밀라노의 상트에우스토지오(Sant'Eustorgio) 성당에서 가져온 동방박사의 유물을 받게 됐다. 유물을 경배하기 위해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들게 됐고, 격에 맞게 보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결국 프랑스의 아미앵 대성당을 참고한 고딕양식으로 성당을 짓기로 했다.

1248년 8월 15일, 호흐스타덴의 콘라드(Konrad von Hochstaden) 대주교가 초석을 놓았다. 기초공사가 마무리된 1250년 시작된 교회의 동쪽 부분 공사는 릴레의 게르하르트(Gerhard von Rile)의 감독으로 완성돼 1322년에 봉헌됐다. 서쪽 부분은 1353년부터 1390년 사이 사보엔의 미카엘(Michael von Savoyen)의 감독으로 건축됐다. 하지만 종탑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건축비용의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공사는 오랜 기간 이어갈 수 없었다. 

중세에 대한 낭만적인 열망이 고조되던 19세기 무렵, 대성당의 전면(façade)의 설계도가 발견되면서 개신교 성향의 프로이센 법원이 대성당을 완성하기로 결정했다. 1842년 중앙 대성당건설협회(Central-Dombauverein)가 결성돼 시민성금으로 건축비용의 3분의 2를 모았고 프로이센주가 나머지를 부담하게 됐다.

독일 낭만파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는 ‘독일. 어느 겨울동화(Deutschland. Ein Wintermärchen)’에서 중세 이후로 건설이 중단된 상태인 쾰른 대성당의 건설을 재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종교개혁을 계기로 가톨릭의 상징인 쾰른 대성당의 건설이 중단됐던 것 아니냐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저기 좀 봐! 달빛 속에 / 거대한 녀석을! / 그 놈이 악마처럼 검게 솟아있지, / 그게 쾰른의 대성당이야. // 그것은 정신의 감옥으로, / 교활한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를 생각나게 하지: / 이 거대한 감옥 속에서 / 독일의 이성이 쇠약해지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성당 건설이 적극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18세기 말 프랑스가 쾰른을 지배한 것과 관련이 있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들어선 프랑스 제1공화국과의 전투에서 신성로마제국이 패배하면서 1794년부터 라인강 서쪽 지방을 프랑스에 넘겨줬다가 나폴레옹이 실각한 1815년 빈회의 결정에 따라 다시 프로이센왕국의 통치를 받게 됐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족적 자각이 고조되면서 미완성인 쾰른 대성당을 완성하겠다는 의지가 발동된 것이다. 1880년 쾰른대성당은 600년 가까운 세월을 넘어 완공을 보게 됐다. 10월 15일 빌헬름 1세가 참석해 독일제국 건국을 위한 통일독일의 정체성 확립을 목적으로 한 완공 축제가 거행됐고, 다음날에는 개신교 신자의 예배가 열렸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벌어진 쾰른 공습에서 투하된 소이탄으로 일어난 화재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폭격으로 신랑 등의 아치형 천장과 내부, 외부 석상들이 파손됐다. 화재로 발생한 그을음이 하얀색의 조면암 틈새에 끼어들면서 검게 변하고 말았다. 석재 자체가 약하기 때문에 세척이 불가능한 형편이다. 오늘날 성당은 산성비로 인한 석재의 부식과 매연으로 심해져가는 변색 등 보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쾰른 대성당은 서쪽, 남쪽 그리고 북쪽에 각각 현관을 두었다. 서쪽 현관의 오른쪽에 있는 ‘베드로 현관’이 1370년에서 1380년 사이에 지어져 사용되던 원래의 현관이다. 왼쪽현관은  ‘동방 박사 현관’으로 1872년에서 1880년 사이에 건설됐고, 중앙 현관은 이름이 지어지지 않았다. 남쪽 현관은 신고딕 양식으로 만들어졌는데, ‘수난의 현관’이라는 중앙현관을 중심으로 왼쪽은 ‘우르술라 현관’ 오른쪽은 ‘게레온 현관’이라고 한다. 

쾰른과 연관이 있는 우루슬라 성녀와 게레온 성인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북쪽 전면부는 초대 교황인 베드로 성인의 사제 서품 인도식으로 시작되는 쾰른 대성당의 역사에 따라 설계됐다. 마테르누스는 베드로의 첫 번째 제자로 여겨지며, 쾰른의 초대 주교다. 중앙의 ‘미하엘 현관’을 중심으로 왼쪽을 ‘보니파티우스 현관’, 오른쪽을 ‘마테르누스 현관’이라 부른다. 

144m 길이의 쾰른 대성당의 신랑은 세계적으로 손꼽힐 정도로 길고, 바닥부터 천장까지의 높이는 43.35m로 세계에서 4번째로 높다. 지붕틀은 목재가 아닌 철제 들보로 만들었고, 3㎜ 두께의 납판으로 덮었다. 납판의 무게는 약 600 톤이다. 대성당의 옥상면적은 1만2000 m²에 달한다. 쾰른 대성당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창문을 장식하는 스테인드글라스다. 전체 면적이 1만㎡에 이르는데, 그 가운데 1500㎡의 것은 중세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1260년에 제작된 동방박사 예배당의 창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쾰른 대성당에서 꼭 봐야 할 유물은 동방박사의 유물함이다. 성가대 중앙에 위치한 금박의 유물함은 13세기 무렵 제작된 유럽에서 가장 큰 중세 금 세공품이다. 유물함은 길이 220cm, 너비 110cm, 높이 153cm이며, 대성당 모습으로 제작됐다. 청동과 은으로 만들고 금박을 입혔으며 1천개 이상의 보석과 진주로 장식했다. 

동방박사의 것이라고 하는 유골을 담고 있다. 동방박사의 유물함이 있는 곳에는 1322년에 봉헌된 높은 제단(Hochaltar)도 있다. 흰색 대리석으로 만든 벽감의 중앙에 성모마리아의 대관장면을 조각했고, 좌우로 12사도를 새겨 넣은 아케이드 위에 452cm×212cm로 총면적 9.58㎡의 검은 대리석 석판을 덮었다.

성물안치소 부근에 게로의 십자가(Gero-Kreuz)가 있다. 대주교 게로의 의뢰로 서기 965년에서 97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알프스 이북에서는 가장 오래된 십자가다. 높이 187㎝에 팔 길이는 165㎝인 게로의 십자가에서 후광과 십자가는 처음 만든 것이지만, 1683년에 바로크 양식의 뒤 배경이 추가됐다.

아질롤푸스 제단(Agilolphusaltar)은 8세기 무렵 쾰른의 주교 아질롤프(Agilolf)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앤트워프 제단양식으로 1520년경 제작된 것이다. 높이 5.50m에 너비 7m의 양쪽 접이식 제단에는 예수의 열정적인 삶에 대한 장면들을 새겼다. 대성당 바닥을 장식한 모자이크는 총면적이 약 1300m²에 달하며, 1885년에서 1892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중세 무렵의 영적, 세속적 삶을 은유적으로 묘사했다.

쾰른 대성당의 내부를 구경하고 나와 성당을 한 바퀴 빙 돌아보았다. 성당의 벽을 온통 검게 물들이고 있는 화염의 흔적 사이로 하얀 속살을 내보이는 것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석재의 표면이 깎여나간 흔적이리라. 멀리서 바라본 성당의 지붕 위로 삐죽삐죽 돋은 첨탑은 활에 걸린 화살처럼 보인다. 

프랑스의 자유로운 유랑자 실뱅 테송은 대성당과 첨탑을 활과 화살에 비유해 “대성당은 하늘을 향해 한껏 시위가 당겨진 활과도 같다. 고딕식 첨탑의 화살이 날아가지 않는 것은 아직 과녁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흥미로운 점은 ‘고양이 왕자’라는 별명을 가진 실뱅 테송은 한밤중에 검은 옷을 입고 성당을 기어오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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