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가족영화의 모범답안이 나왔다. 영화 ‘이장’은 현 시대에 가족이란 개념이 얼마나 불필요한지, 얼마나 삶을 고달프게 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동시에 가족이 가족일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 느끼게 한다. 서로 다른 개성의 인물들이 충돌하고 서로를 할퀸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가족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도 말없이 받아들인다.
‘이장’(감독 정승오)은 아버지 묘를 이장하기 위해 흩어져 살던 오남매가 오랜만에 모여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장녀 혜영(장리우)과 통제불가 초등학생 아들 동민(강민준)이 탄 차에 금옥(이선희), 금희(공민정), 혜연(윤금선아)까지 한 명씩 올라탄다. 끝내 연락을 받지 않는 승락(곽민규)을 제쳐두고 떠난 이들은 바다를 건너 큰아버지, 큰어머니가 사는 집에 도착한다. 정작 큰아버지는 “어떻게 장남도 없이 무덤을 파냐”고 소리치며 다툼이 시작된다. 결국 이들은 배가 끊기기 전까지 승락을 찾아오기 위해 다시 서울로 떠난다.
‘이장’은 급변하는 한국 가족의 현재를 과감히 해부하고 들여다본다. 가족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제시하기보다 그 안에 숨겨진, 피하고 싶은 본질을 이야기한다. 결론이나 메시지를 제시하는 대신 묵묵히, 그리고 끈질기게 지켜본다. 가족의 벽에 부딪혀 힘을 잃는 개인의 무력한 순간도 있고, 가족이라서 벌어질 수 있는 놀라운 순간도 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인물들이 화해하는 장면들이다. 누군가에겐 하지 말았어야 할 이야기, 누군가에겐 해도 상관없는 이야기가 늘 싸움의 불씨가 된다. 순간적으로 솟구친 화는 말리기 힘든 다툼으로 번진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나지만, 결국 다들 말없이 돌아온다. 돌아오는 걸 막는 사람도 없다. 그들 사이에 어떤 소리 없는 대화가 오갔는지 알 수 없다. 가족이니까, 그걸로 됐다는 뉘앙스만 전해질 뿐. 막이 올라가도 마음에 깊게 남을 보석 같은 화해의 순간들이야말로 ‘이장’이 이룬 가장 큰 성취다.
가장 한국적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는 가장 한국적이지 않은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묘를 옮기는 문제나 남아 선호 사상 같은 한국적인 소재는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긴장감을 주는 동력으로 사용되는 데 그친다. 결국 영화는 개인과 가족이란 보편적인 이야기로 향한다. 가족의 굴레를 벗어나고 부정하는 개인마저 따뜻하게 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이장’이 해외 영화제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일본 영화 ‘걸어도 걸어도’(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할리우드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감독 조나단 데이턴, 발레리 페리스) 등 그동안 세계 각국에서 호평받았던 가족영화도 여럿 떠오른다.
다음달 5일 개봉.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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