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2018년 6월, 이종필 감독은 제작사 대표의 소개로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시나리오 초고를 처음 만났다. 원래 설정은 사회고발물이었다. 사람들의 연대의식을 다루며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고발하는 이야기. 이 감독은 이 이야기의 가치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 발 더 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고발에서 끝나지 않고 승리하고 문제가 해결되는 이야기. 거기에 인물들의 ‘파이팅’과 빠른 속도감이 더해지면 관객들이 재밌게 보지 않을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출발점이다.
영화 개봉을 하루 앞둔 지난 20일 서울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이종필 감독은 “두근거리고 설렌다”고 했다.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영화인만큼 “이제 제 할 일은 다 끝난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이 감독의 표정에서 약간의 긴장과 후련한 마음이 동시에 읽혔다. 이 감독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시나리오를 처음 만난 순간을 떠올리며 “신나는 걸 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털어놨다.
“재밌는 걸 보고 싶었어요. 처음엔 시나리오의 캐릭터도 좋고 이야기의 가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진지한 이야기라 망설였죠. 집에서 멍하니 생각하다가 쌀 포대를 쏟았어요. 쌀알이 바닥에 쫙 퍼지더라고요. 이전 같았으면 ‘왜 내 인생은 이 모양이야’ 하며 우울해하고 자괴감을 느꼈을 텐데, 제가 아무렇지 않게 쌀알을 줍고 있더라고요. ‘나답지 않게 왜 이러지’ 하며 생각해보니 시나리오 속 세 친구들의 이야기가 제 안에 들어왔기 때문인 것 같았어요. 그동안 제가 본 인물들은 인생에 큰 문제가 찾아 왔을 때 도망가거나 우울해했어요. 하지만 이 인물들은 어떤 식으로든 정면승부해서 해결해나가는 힘이 있더라고요. 그 힘을 신나게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게 제 출발점이었어요. 판타지일지 모르겠지만, ‘파이팅’하는 사람들이 승리하는 이야기를 영화에서 한 번쯤 보고 싶었어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는 인물들의 사연이나 퇴근 후 일상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짜임새 있게 탁탁 치고 가는 맛”이 우선이었던 이종필 감독은 “다양한 설정들을 집어넣을 틈이 없었다”고 했다. 덕분에 영화는 인물들이 집에 가지 않는 ‘이상한 영화’가 됐다. 괜히 캐릭터들에게 미안해서 쉴 틈을 주기 위해 국수와 꽈배기 등 먹는 장면을 여러 차례 집어넣기도 했다. 평범한 인물들을 어떻게 다룰지에 관한 힌트는 故 박완서의 수필에서 찾았다.
“내부고발 사례도 찾아봤고 다큐멘터리도 많이 봤어요.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제가 좋아하는 박완서 작가 작품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영화에 등장하는 대자보도 박완서 소설의 영향을 받은 거예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라는 수필이 저에게 큰 답이 됐어요. 엘리트는 소수일 뿐, 대부분은 꼴찌가 아닐까하는 이야기예요. 꼴찌로 달리는 마라톤 선수가 정말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며 감동을 느끼는 내용이 있어요. 그게 영화 내용적으로 핵심이었던 것 같아요.”
최근 배우 이솜은 쿠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함께 작업한 이종필 감독에 대해 “정말 준비를 많이 해오신다”며 “가장 열심히 하셨다. 새벽에 일어나서 찍고 싶은 걸 스케치북에 정리해 오신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감동받았다”고 털어놨다. 이에 이 감독은 “잘 안되고 괴로워서 미칠 것 같은 시기도 있었다”며 “그만둘까 생각도 했지만,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 구성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다보니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게 됐다. 새벽 4시에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현장에서도 이전 작품과 달라진 점이 많다고 했다.
“과거엔 영화를 잘 찍어야한다는 연출자의 고뇌에 빠져있었다면, 이번엔 소재도 일하고 파이팅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쪽에 관심을 뒀어요. 20대 스태프들과 얘기하면 재밌어요. 제 영화에서 조명일을 하고 있다 생각하지 않고, 그가 조명하는 영화에 제가 연출하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이 영화는 정말 저 혼자 만든 게 아니에요. 대사 하나하나, 상황과 소품 등 모든 것에 함께한 사람들이 섞여있어요. ‘어제보다 오늘 더 성장했어’라는 영화 속 대사도 배해선 배우님이 만드셨죠. 영화 내용도, 영화를 찍는 과정도 몽글몽글한 마음들이 서로를 응원하면서 함께 해나가는 것 같았어요.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개봉 이후 8일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순항 중이다. 이미 개봉 전부터 각종 시사회에서 시작된 좋은 입소문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종필 감독은 “우리끼리만 좋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도 했는데, 좋게 봐주셔서 정말 기쁘다”고 웃음을 지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2020년의 인턴 사원부터 1995년을 겪은 꼰대 임원까지 모두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특정 시대의 특정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 대한 얘기 아닐까요. 누구나 공감할 얘기가 들어있는, 영리하게 만들어진 상업영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간 잘 가고,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예요. 영화가 개봉하면 만든 사람들의 손을 떠나서 관객들이 가져가는 거잖아요. 좋은 걸 잘 가져가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