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세어라, FC 구척장신 [‘골때녀’ 최애 월드컵②]

굳세어라, FC 구척장신 [‘골때녀’ 최애 월드컵②]

기사승인 2021-08-18 13:00:20

<편집자 주> 박선영을 응원하자니 한혜진이 눈에 밟히고, 한혜진을 응원하자니 옐로디가 걸린다. SBS 여자 축구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 얘기다. 마음 같아서는 여섯 팀 모두를 응원하고 싶지만, 하늘 아래 우승팀은 한 팀 뿐. 누군가는 패배의 쓴맛을 봐야 한다. 당신, 아직도 어느 팀을 응원할지 몰라 망설인다면 아래 기사와 함께 ‘최애’를 골라 보시라. 이름하여 [‘골때녀’ 최애 월드컵]

그래픽=이희정 디자이너.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만약 강백호가 서태웅을 능가하는 농구 천재였다면, ‘슬램덩크’는 스포츠 만화의 전설로 남을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가 피파(FIFA·국제축구연맹) 1위 강국이었다면,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진출이 신화로 기록될 수 있었을까. 모름지기 스포츠에서 가장 가슴 벅찬 순간은 모두의 관심 밖에 있던 언더독이 만들어내는 법. 그래서 감히 말한다. FC 구척장신이 파일럿 리그에서 꼴찌가 된 순간, 그들은 정규 리그 주인공이 될 운명을 끌어안았다고.

평균 신장 175.1㎝를 자랑하는 구척장신은, (신봉선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 마디로 “장대들”이다. 이들은 키가 크고 보폭도 큰 탓에 공을 통제하기가 어렵다. 마른 몸을 유지해야 하는 직업 특성상 몸싸움에도 취약하다. 구척장신이 이런 불리한 신체조건을 극복하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건, 1승을 향한 집념과 끈기 덕분이다. 주장 한혜진은 경기 도중 발톱에 멍이 드는 부상을 입고도 “2회 경기는 언제 하는데요? 발톱이 자라야 하는데, 그 정도 시간은 주시는지…”라며 전의를 불태웠다. 이현이는 허벅지에 피멍이 들도록 연습에 매달렸고, 차수민은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승부차기까지 경기를 풀타임으로 소화했다. 골문 앞 외로운 싸움을 꿋꿋하게 견디는 아이린이나 마지막 순간까지 공을 포기하지 않는 김진경, 결정적인 순간마다 제몫을 해내는 송해나 등 누구 하나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

“모델 일은 개개인이 하는 거라 서로 이름을 크게 부르짖을 일이 없다”(한혜진)던 구척장신은 경기 내내 목이 터져라 서로를 부르며 응원과 격려를 나눈다. 그 모습을 보며 울지 않는 방법을 나는 모른다. 최용수 감독은 말했다. “축구에서 결과도 중요하지만, 우리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도 상당히 중요해.” 감동의 크기로 점수를 매긴다면, 우승컵은 구척장신에게 주겠어요. 꼴찌에게 내일은 없다는 말처럼,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다. 그러나 경기에서 지더라도 서로의 노고를 헤아리며 눈물을 나눌 만큼 선수들의 세계는 뜨겁다. 이 당연한 사실을 구척장신이 온 몸으로 보여줬다.

승부차기를 앞둔 이현이.   SBS ‘골 때리는 그녀들’ 캡처.
‘입덕’을 부르는 순간

FC 구척장신과 FC 국대 패밀리의 승부차기. 파일럿 당시 FC 국대 패밀리에 4골을 허용했던 FC 구척장신은 정규 리그 첫 경기에서 FC 국대 패밀리를 만나 설욕을 시도한다. 전반전 한혜진의 선제골로 승리를 굳혀가는 듯 했으나 경기 직전 골문을 내준 상황. 이어진 승부차기에선 FC 국대 패밀리가 한 점 차로 앞선다. 그 때, ‘공식 구멍’으로 통하던 이현이가 마지막 키커로 나서 동점골을 기록한다. 기쁨의 함성을 내지르며 바닥에 엎드리는 그의 곁으로 하나 둘 동료들이 몰려든다. 골 맛이 이리도 짜릿했던가. 차수민도 울고, 나도 울고, 잔뜩 긴장한 내 겨드랑이도 함께 울었다.

‘과몰입’을 유발하는 순간

안 그런 선수가 있겠냐마는, 한혜진은 유독 ‘축구에 진심’이다. 그는 멍든 발톱을 붙잡은 채 다음 경기를 걱정하고, 물 차오른 무릎으로 그라운드를 쏘다닌다. ‘골 때리는 그녀들’ 정규 리그를 준비하던 시절 한혜진의 SNS는 온통 축구, 축구, 축구 사진으로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시청자의 ‘과몰입’을 부른 건 한 장의 축구화 사진. 한혜진은 그 위에 이렇게 썼다. ‘하이힐 대신 축구화’(Football boots instead of high heels). 이런 악바리 주장이 있는데 시즌2를 만들지 않는다면? 제작진, 유죄다.

주목할 선수

‘검은 리본’ 아이린. 파일럿에서 FC 구척장신이 ‘무득점 최다실점’이라는 굴욕을 겪은 탓에 그 진가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슈퍼 세이브’라고 부를 만한 장면을 여러 차례 만들었다. 손으로 막고, 발로 막고, 안 되면 얼굴로도 막는 패기는 물론, 순발력과 센스, 판단력을 두루 갖췄다. 승부차기를 거듭할수록 담력과 정신력도 나날이 강해지는 중. 이대로라면 FC 구척장신이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치는 날이 머지않았다.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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