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여가 이상하다, 수당이 잘못 계산된 것 같다, 우리는 왜 연차를 안 주냐’ 불합리한 내용을 시정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갑자기 퇴사를 종용받거나 괴롭힘이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규모가 작은 병‧의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노동법 사각지대’에 놓인 것으로 나타났다. 임금체불, 근로계약서 미작성, 공휴일 근무수당 미지급 등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사례가 다수 적발됐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는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보건의료노동자 기본권 보장을 위한 토론회’를 열고 ‘중소 병·의원 노동자 노동조건 실태조사’를 발표했다. 실태조사는 4월15일부터 5월17일까지 간호사·간호조무사·물리치료사·방사선사·임상병리사·작업치료사·치과위생사 등 4058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무급휴가에 임금삭감까지… 코로나 장기화로 불이익 받아
조사 결과 중소병‧의원 노동자들이 노동기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2020년 8월 조사 결과보다 더욱 열악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근로계약서 미작성 25.1%→30% △야간수당 미지급 21.8%→30.7% △토‧일 근무율 73.9%→88.2% △토‧일 근무수당 미지급 73.9%→88.2% △공휴일 근무수당 미지급 31%→42.5% 등이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장기화로 불이익을 겪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중소병‧의원 노동자의 94%가 불이익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특히 무급휴가, 연차 강제 소진 등 휴가 관련 불이익이 48.7%로 가장 많았다. 감염 관련은 19.2%, 임금 삭감 등 임금 관련 불이익도 18.3%에 달했다. 심지어 3.2%는 해고를 당했다고 밝혔다.
심층면접에 참여한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A씨는 “감염예방 추가업무를 해도 수당 미지급, 본업무 외 업무 지시, 임금체불 등을 경험했다. 특히 코로나19 검사를 받지 말라고 지시하거나 코로나 확진 시 격리기간을 축소하고 업무 복귀를 지시했다. 의료인력 격리자가 많아도 대체인력 없이 업무 강도가 심해졌다”고 토로했다.
출산휴가도 보장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산휴가를 받지 못했다고 밝힌 응답자가 14.8%에 달했다. 종사자의 약 80%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일하면서 출산‧육아를 병행하는 것이 힘든 근무환경이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많은 의료기관들이 배우자 출산휴가, 육아휴직 등 남녀고용평등과 일 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조항을 위반하고 있었다.
고용불안을 느끼는 노동자는 41.3%에 달했다. 고용불안 정도를 묻는 질문에 ‘그렇다’가 29.5%, ‘매우 그렇다’가 11.8%로 나타났다. 고용불안이 가장 높은 직종은 간호조무사(60.1%)였다.
규모 작을수록 불이익 더 커져… 사회보험 미가입율 4% 육박
5인 미만 의료기관의 경우 더욱 열악한 실정이었다. 근로기준법에 5인 미만 사업장은 적용되지 않는 조항이 많은 탓이다. 관공서 공휴일, 연장‧야간‧휴일 근로, 연차휴가, 태아검진 휴가 등은 5인 미만 사업장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조항이다.
또한 임금명세서 미교부, 사회보험 미가입 비율이 5인 이상 사업장에 비해 더 높았다. 5인 미만 사업장의 26.9%가 임금명세서를 받지 못했다. 5인 이상 사업장(14%)에 비해 2배 가까이 높은 수치다. 임금명세서를 교부하지 않을 시 임금의 항목을 비롯해 연장근무, 야간근무, 휴일근무 급여가 옳게 지급됐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4대 보험 미가입율도 높았다. 5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건강보험 미가입률이 4.5%, 고용보험 3.7%, 산재보험 5.5%, 국민연금 4.9%에 달했다. 5인 이상 사업장의 사회보험 미가입률(건강보험·2.4%, 고용보험·3.1%, 산재보험·3.1%, 국민연금·3.8%)을 상회하는 수치다.
비인간적 대우를 경험한 이들이 더 많기도 했다. 5인 이상 사업장이 32.9%였던 반면 5인 미만 사업장은 38.2%로 5.3%p 차이가 났다. 직종별로 간호조무사가 48.6%로 가장 높았다. 직업치료사는 44.7%, 물리치료사는 44.3%, 기타직 42.9%, 간호사 38.1%, 임상병리사 34.5%, 치과위생사 32.6%, 일반직 31.1% 순이었다.
노동자 B씨는 “원장이 소리를 지르고 폭언을 한다”면서 “원장 병원이라 다들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견디다가 퇴사해버린다”고 증언했다.
보건의료노조는 “5인 미만 사업장이라는 이유로 열악한 노동조건을 방치하는 것은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책임지는 공익사업장으로서 사회적 책무를 방기하는 것”이라며 “중소병‧의원 노동자들에게도 노동기본권을 차별 없이 보장하기 위해 근로기준법상 5인 이하 사업장 적용 제외를 삭제하고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도록 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는 일 비해 임금 적다”… 최저 수준 임금 받아
중소병‧의원 노동자의 임금 불만은 79.8%에 달했다.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이 적나’라는 질문에 ‘매우 그렇다’가 27.9%, ‘그렇다’가 51.9%로 불만족도가 매우 높았다. 임금 불만족도가 80% 이상은 직종은 임상병리사(85.4%), 방사선사(82.4%), 물리치료사(81.2%) 순이었다.
실제로 규모가 작은 병‧의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최저 기준에 가까운 임금을 받고 있었다. 조사 결과 사회보험료와 소득세 14%를 제한 실수령액이 2000만원 미만은 1%, 2000만원대는 35.1%, 3000만원대는 39.5%, 4000만원대는 17.1% 등이었다.
최저임금이나 서울시 생활임금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노동자도 있었다. 2021년 최저임금(실수령액 1984만원) 미만자는 1.4%, 서울시 생활임금(실수령액 2411만7840원) 미만자는 13.1%로 나타났다. 특히 5인 미만 사업장은 최저임금 미만자가 1.5%, 생활임금 미만자는 27.8%로 5인 이상 사업장(10.8%)에 비해 2.8배 정도 차이가 났다.
보건의료노조는 “응답자가 연장근로수당, 야간근로수당, 식대 등의 수당을 포함한 금액을 답했기 때문에 이를 고려한다면 최저임금 위반 비율과 생활임금 수준 미만자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보건복지부는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박지민 복지부 보건의료정책과 사무관은 “국민 인식이 높아지면서 요구 받는 보건의료서비스 질이 높은 만큼 서비스 제공 당사자인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서 “복지부가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은빈 기자 eunbeen1123@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