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규제 혁신으로 식당과 마트 풍경이 점차 달라질 전망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가 식의약 정책 전반에 혁신을 시작했다. 11일 식약처는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간담회를 열고 그동안 개선 요청이 많았던 신산업, 민생, 국제조화, 절차적 규제 4개 분야에서 총 100건의 규제혁신 과제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완료 시점은 이르면 올해 말, 늦어도 2025년 말까지로 과제마다 상이하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는 민생(45건)이다. 빠른 시일 내 생활에 변화를 가져올 내용이 상당 부분 들어갔다. 냉동육이나 가공식품 판매 정책, 식품용기 재활용 정책, 음식점 운영 규정 등 일상과 밀접한 개정사항이 다수다. 친환경 신소재, 새롭게 개발된 식품 원료 등을 도입할 제도적 기틀을 준비하기 위한 과제도 있다.
‘고양이 카페’ 규제 샌드박스 들어간다
반려동물을 동반하고 식음료를 즐기는 이른바 ‘고양이 카페’, ‘펫카페’ 등이 합법적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현재 시중에 영업 중인 동물 동반 음식점은 엄밀히 따지면 모두 불법이다. 현행 식품위생법에 따르면 음식점에서 동물을 사육하거나 전시하려는 사업자는 원칙적으로 동물과 사람을 공간적으로 분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케이지나 펜스 내 공간에 있는 고양이를 보며 커피를 마시는 카페는 합법이지만, 고양이 옆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카페는 위법이다.
앞으로는 사업자가 원하면 동물 동반 출입을 허용할 방침이다. 사업자가 신청하면 영업장에 동물과 동반 출입할 수 있다는 안내문을 게시하게 된다. 다만 영업장 내 동반 출입이 가능한 동물은 개와 고양이로 한정된다. 식품을 취급하는 조리장, 원료 보관창고 등의 시설에는 동물 출입이 금지된다.
동물 동반 출입 영업장에는 별도의 위생·안전 관리 규정이 적용된다. 규정은 식약처, 산업계, 동물전문가, 소비자단체가 토의를 거쳐 도출할 계획이다. 식약처는 오는 2025년까지 동물 동반 출입 음식점에 대한 규제 샌드박스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식품위생법 시행규칙을 개정할 계획이다.
신소재·친환경 종이컵·빨대 맞이할 준비
친환경 소재로 만든 일회용 컵과 빨대를 쉽게 접할 수 있을 전망이다. 지금까지는 기준이나 규격이 정해지지 않은 새로운 재질로는 위생용품을 제조할 수 없었다. 쉽게 분해되는 친환경 소재, 여러번 사용할 수 있는 기능성 소재를 새롭게 개발해도, 시장에 진입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앞으로는 신기술이 적용된 재질도 안전성 확인을 거쳐 신속히 제품화할 수 있게 된다. 식약처는 안전성 자료를 바탕으로 한시적으로 기준·규격을 인정하는 제도를 도입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내년 6월까지 위생용품 관리법 개정을 추진한다.
아울러 식품용기 재활용도 활성화한다. 기존에는 페트(PET) 재질에 한해 식품용기 재활용이 허용됐다. 식약처는 오는 2025년 12월까지 관련 고시를 개정해 폴리에틸렌(PE)과 폴리프로필렌(PP) 등 다른 플라스틱 재질에 대한 재활용도 허용할 방침이다. 현재는 식품용 플라스틱의 27%만 재활용 가능했지만, 고시가 개정되면 87%가 재활용 대상에 포함된다.
유통기한 대신할 ‘소비기한’ 1년 계도기간
마트에서 식품에 찍힌 ‘유통기한’이 사라지는 시점은 1년 늦어졌다. 당초 내년 1월1일 시행 예정이었던 소비기한 표시제에 1년의 계도기간을 부여하기로 했다. 유통기한은 식품을 판매할 수 있는 기간이다. 소비기한은 식품을 실제로 먹을 수 있는 기간이다. 식품의 유통기한이 경과한 이후라도, 표기된 보관법을 준수했다면 소비기한까지 안전하게 섭취할 수 있다.
그동안 환경시민단체들은 소비기한 표시제를 전면 도입해야 한다고 촉구해 왔다. 편의점과 같은 소매점에서 섭취에 전혀 문제가 없는 식품이 유통기한이 경과했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일본과 유럽 등 해외 주요 선진국에서는 소비기한과 ‘상미기한(식품의 맛이 가장 좋은 기간)’을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식약처는 소비기한 표시제 시행에 따른 기업 고충을 고려했다. 단기간에 많은 품목의 포장지를 변경해야 하는 기업들은 현실적으로 시행일을 준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통기한이 기재된 포장지가 재고로 쌓여있는 기업들은 이를 폐기하는 데 추가 비용을 소모해야 한다. 식약처는 계도기간을 활용해 기업들이 유통기한 표시 포장지를 소진하도록 하고, 준비가 완료된 기업들은 계도기간 중이라도 소비기한 표시를 할 수 있도록 유연성을 둘 방침이다.
냉동 식품 소분 구매… 반찬가게서 고기 판매
대용량의 냉동식품을 해동해 필요한 만큼만 살 수 있게 된다. 현재는 한번 해동된 식품은 재냉동을 금지하고 있어, 해동 후 남은 분량을 장기간 보관하거나 폐기하는 낭비가 발생하고 있다. 앞으로는 해동하지 않으면 소분이 어려운 식품을 중심으로 소분과 재냉동을 허용할 방침이다. 물론, 이런 조치는 품질과 위생에 영향이 없다고 확인된 식품에 한정해 적용한다. 식약처는 이를 위해 오는 12월까지 식품의 기준 및 규격 고시를 개정할 계획이다.
마트나 정육점이 아닌 곳에서도 고기를 살 수 있게 된다. 현재 마트는 식육판매업 영업 신고를 하지 않아도 포장육을 판매할 수 있는 예외대상이다. 반찬가게와 같은 식품판매장의 경우 예외대상인지 불분명해, 사업자들의 혼란이 지속됐다. 또한 하나의 점포에서 식육판매업과 다른 영업을 동시에 운영할 경우 벽등으로 공간을 분리해야 했다.
앞으로는 반찬가게도 적절한 시설만 갖추면 고기를 팔 수 있다. 식약처는 냉장‧냉동시설을 갖춘 식품판매장에서는 식육판매업 영업신고를 하지 않아도 포장육을 판매할 수 있도록 규정을 명문화할 계획이다. 하나의 점포에서 식육판매업과 다른 영업을 동시에 운영하는 경우 벽이 아닌 선으로 단순 구분만 하는 것도 허용할 방침이다.
민·관 소통 기반 ‘안전한 혁신’ 추진할 것
식약처의 규제혁신은 민·관 소통에 방점이 찍혔다. 식약처는 규제 개선 과정에 산업계와 소비자 시민사회계의 의견을 적극 반영,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한다는 목표다.
오유경 식약처장은 “새정부 출범 이후 내부적으로 식약처는 총 7번의 ‘끝장토론’을 진행해 식의약 분야 규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민·관·학 대화를 통해 규제혁신 요구를 폭넓게 수렴했다”며 “국민 안전을 최우선에 두면서도 식의약 규제 변화를 빠르게 체감할 수 있도록 100대 과제를 신속히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강석구 대한상공회의소 조사본부장은 “이번 100대 과제는 정부와 산업계의 적극적인 토의에 기반해 도출된 것으로 기업 현장에서 느끼는 변화가 매우 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며 “기업과 시장의 현실을 고려해 규제의 유연성을 확보하고, 불필요한 서류제출 및 교육 등 행정부담을 완화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내다봤다.
원영희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장은 “기업활동에 모래주머니같은 불합리한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시민사회계도 동의한다”면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식의약 정책의 최우선 가치는 안전이며, 안전 문제와 관련해서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식의약 정책은 국민 건강의 안전망인 만큼, 식약처 규제혁신 과정에서 국민의 목소리가 충실히 반영될 수 있도록 긴밀히 소통하겠다”고 설명했다.
한성주 기자 castleowner@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