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을 또 해도 될까. 올해 초 배우 연민지는 KBS2 일일드라마 ‘황금가면’ 출연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그가 제안 받은 서유라는 그야말로 빌런 끝판왕 격인 인물이다. 이전에도 얄밉고 못된 인물을 연기한 경험이 있지만, 일일드라마 특성상 악한 정도가 훨씬 높다. 연민지는 고민 끝에 오히려 끝판왕이면 해볼 만하다는 결론에 닿았다. 그렇게 100부작 대장정을 시작했다.
지난 6일 서울 신사동에 위치한 소속사 케이원엔터테인먼트 사무실에서 만난 연민지는 “안 끝날 것 같았다”라며 긴 시간 촬영의 여운을 느꼈다. 드라마를 찍으면 태어나서 처음 듣는 심한 욕 메시지를 개인 SNS를 통해 받기도 했다. 사람도 아니라는 말도 들었고, 생명을 위협하는 협박성 글도 받았다. 충격이 컸다. 드라마 후반부로 갈수록 그것에도 점점 익숙해졌다. 오히려 그를 좋아하고 응원하는 반응이 늘었다. 연민지 역시 “처음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역할이었다”라고 캐릭터를 설명했다.
“말이 안 된다고 얘기했더니 CP님이 ‘라푼젤’을 생각해보라고 하셨어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고요. 그 얘길 듣고 제가 납득하고 연기하면 보는 시청자들도 납득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일일드라마 특성상 시청자들이 극적인 이야길 원한다는 생각도 했고요. 감정 연기를 할 때는 무조건 소리 지르려고 하지 않았어요. 결정적인 순간에만 질렀죠. 소리 지르는 것보다 눈을 마주치면서 저음으로 말하면 더 무서워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체력이 중요했다. 처음 3개월은 일주일에 5일씩 촬영했다. 쉬는 시간에도 대본을 봐야 했다. 자면서 분장을 받았다. 또 극 중 서유라가 활약할수록 배우 연민지는 점점 외로워졌다. 연민지는 “어느 순간 모든 캐릭터가 다 나를 싫어했다”라며 “모든 사람이 화를 내니까 서운하고 외로웠다”라고 털어놨다. 반대로 카메라가 멈추면 모든 게 달라졌다. 악역 캐릭터로 호흡을 맞춘 배우 나영희와 연기하는 경험도 색달랐다.
“나영희 선생님과 같이 연기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배운 것 많아요. 물건을 던지거나 물을 뿌리는 연기를 할 때 조절하는 게 어렵거든요. 선생님들은 정말 한 번에 정확히 하세요. 제가 정말 세게 맞는 것처럼 보여도 손끝 하나 안 스치거든요. 순간 감정이 살아나는 연기도 대단하시죠. 극 중에서 제가 지면 안 되는 상황이라, 물을 맞아도 움찔거리거나 눈 깜빡이면 안 된다고 이미 마음을 먹어요. 그걸 해냈을 때 선생님들이 좋아하시면 쾌감을 느끼죠. 어느 날은 촬영을 마친 후에 오늘은 내가 졌다고 하시더라고요.”
연민지는 고등학생 때 SM 연습생으로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영화를 찍으며 연기를 시작했다. 연민지는 “그 때까지만 해도 연기 욕심이나 관심이 없었다”며 “끌려 다니듯이 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연기에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연기를 잘하고 싶었고, 좋은 배우가 되고 싶었다.
“연기 욕심이 많아지니까 더 힘들더라고요. 7년 전 일일드라마를 하고 2년을 쉬었어요. 지치고 힘들었거든요. 돌아온 다음엔 오디션을 보고 연기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좋았어요.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연기가 싫어진 건 아니었거든요. 잘 버텨서 지금까지 오지 않았나 싶어요.”
연민지는 이제 시작이다. 무엇이든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 한다. 또 악역을 받아도 잘할 자신이 있다. ‘황금가면’이 남긴 의미도 특별하다. 지금까지 그의 출연작 중 가장 크고 중요한 작품이다.
“‘황금가면’을 보면서 욕해주신 것도 관심이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드라마를 잘 봐주신 거니까요. 유라를 많이 미워하고 불쌍하게 여겨주신 것도, 많이 봐주시고 관심 가져주신 것도 감사한 일이었어요. 드라마 보신 분들이 다 서유라라는 이름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 하시더라고요. 배우 이름도 많이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