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운
1978년 서울출생. 일본계 모터싸이클 회사의 한국지점 입사를 계기로 2008년 일본으로 넘어와 글로벌 IT기업의 마케팅부서에서 근무하며 한일 양국에 한 발씩 걸친 경계인으로 살고 있다. 현재 거주지는 시노노메(東雲). 김동운은 필명이다.
[쿠키칼럼]
몇 해 전 일본에 놀러 온 여고생 조카와 시부야와 하라주쿠에 간 적이 있다. 조카는 내 예상과 다르게 줄곧 따분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결국 일본이 촌스럽다는 이야기를 조카에게 들었다. 충격이었다.
일본 젊은이들의 패션 발상지이자 성지인 이 곳들이 한국 여고생에게는 촌스럽다니. 일본 패션 잡지를 보러 명동 중국대사관 골목을 서성이고 일본만화와 드라마에 빠지고 JPOP을 달달 외우던 ‘일뽕’시절을 보낸 나로서는 격세지감이었다.
간혹 여기 도쿄에서 일상 사진을 찍어 한국의 지인에게 보내면 “그곳은 아직 80,90년대 같다”는 농담을 곧잘 듣곤 한다. 세련되고 힙하던 톱클래스의 부유한 선진국 일본이었는데, 점점 촌스러워지고 있는 모양이다.
지금 일본인은 온 가족 해외 여행은 어렵지만 그보다는 적은 비용으로 도쿄 근교로 하루 이틀정도는 갔다 올 수 있는 정도로 산다. 2000-3000 엔정도로도 그럭저럭 고기만찬을 즐길 수 있으며, 100엔샵을 이용하면 그럭저럭 인테리어도 갖출 수 있는, 눈 떠 보니 모두가 유니클로를 입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 나쁠 것은 없지만 과거의 화려함과 세련됨은 느끼기 어렵다.
IMF 구제금융 이전과 이후로 나눠지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이러한 사회 변화의 배경은 버블 경제 붕괴로 거슬러 올라간다.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일본에서는 물가 하락이 시작됐다. 1997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시작된 디플레이션 경제다.
빅맥 지수를 보더라도 일본은 태국 파키스탄 베트남보다도 아래다. 햄버거 값이 동남아보다 저렴하다는 얘기다. 매장 임대료나 원재료비 물류비 전기가스요금 등은 결코 저렴하지 않지만 인건비를 쥐어짜서라도 어쨌든 싸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독특한 싸구려에 대한 집착을 느껴질 정도다. 이런 집착은 소득이 오르지 않는 경제 침체 속에서 일본 가계가 견딜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버블 경제 시대 쿨재팬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싸구려 물건에 관대해지게 만든 것 같다.
작년 일본의 공통포인트업체 폰타(Ponta)가 ‘연말연시에 갖고 싶은것’을 조사했는데, 1위도 식품 (평소에 먹는 것) 2위도 식품(특별한 날에 주문해서 먹는 것) 3위도 식품(외식)이었다. 코로나 시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유행하는 옷이나 신발은 커녕 최신형 휴대폰도 순위에 없었다. 이처럼 소비 의욕이 사라졌으니 당장 쓸 만한 싸구려 물건과 비슷한 체험에 만족해 버리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개인 금융자산은 2000조 엔을 넘어섰다고 한다. 그중 54%가 현금이다. 어마어마한 금액을 은행에 쌓아 둔 일본인들을 가난하다고 할 수는 없다. 앞으로도 경제 상황이 나아질 거라 생각하지 않으니 지갑에 수북이 쌓여 있는 포인트카드와 쿠폰들처럼, 필요해질 그 언젠가를 위해 욕망을 아껴둔 셈이다. 당장은 그럭저럭 쓸 만한 물건과 그럭저럭 비슷한 체험만으로 만족해버리며 싼 티는 눈 감고 싼 가격에 만족하는 하류지향적 소비행동. 일본이 점점 더 촌스러워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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