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퍼’ 박도현에게 한화생명e스포츠(이하 한화생명)는 아픈 손가락이다.
2017년 그리핀(해체)에서 데뷔해 해를 거듭하며 주가를 높이던 그는, 2020년 5월 한화생명에 깜짝 합류했다. 하지만 하위권에 허덕인 팀 성적과 맞물려 방향성을 잃었고, 결국 좌초하며 첫 실패를 겪었다.
분위기 쇄신을 위해 선택한 중국행은 결과적으론 최선이었다. 에드워드 게이밍(EDG)에 입단한 박도현은 금세 중국 최고의 원거리 딜러로 거듭났다. 서머 시즌 우승을 차지한 뒤, ‘LoL 월드챔피언십(이하 롤드컵)’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올해 역시 팀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제 기량을 뽐내며 롤드컵 8강 진출에 기여했다.
잔류가 유력해보였지만, 박도현은 돌연 한국 복귀를 선택했다. 행선지는 친정팀 한화생명이었다.
1일 경기도 일산에 위치한 캠프원에서 만난 박도현은 “돌아오게 돼 기쁘다. 구조가 몇 개 바뀐 것 빼고는 그대로더라. 익숙한 분위기라 좋다”며 웃어 보였다. “백종순 여사가 당연하기라도 한 것처럼 반갑게 맞아줬다. 편하게 식사했다. 김치볶음밥을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중국에서 오래 생활을 하다 보니까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 오히려 먹고 싶더라.”
박도현이 안정적인 중국 리그 생활을 뒤로 하고 국내로 복귀한 이유는 복합적이다.
“LCK 우승을 꼭 이뤄보고 싶었다. 내 간절한 목표다. 그게 가장 크게 작용했다.”, “아시안게임도 당연히 생각하고 있다. 정말 영광스러운 자리다. 만약 발탁 된다면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박도현은 한화생명으로 복귀하는 데 있어서 큰 주저가 없었다고 전했다.
“당시 성적이 좋지 않았다는 건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좋은 기억도 있고 그렇지 못한 기억도 있다. 어딜 가나 있을 수 있는 문제다. 이번에 바로 잡을 기회가 생겨서 정말 좋다.”
“2020년 한 해를 통틀어서 내가 부족한 점들이 눈에 띄었다. 발전하고 싶어서 중국행을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굉장히 좋게 됐다. 한화생명에서의 시간이 그래서 정말 소중했다.”
“팀이 힘들거나 패배하는 순간이 계속 이어질 수 있는데 그럴 때일수록 여유를 갖지 못한 점이 2020년 당시 가장 아쉬웠다. 플레이 적으로도 게임을 좁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은 그 때보다 훨씬 넓게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됐다. 마음에 여유도 생겨서 게임이 편하게 잘 된다.”
2020년 실패를 겪은 뒤, 박도현은 단단히 칼을 갈았다. 극한의 환경으로 스스로를 내던졌다.
“빠른 발전을 원했다. 타지에선 언어도 배워야 되고 국내보단 혹독한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잘해야만 하는 그런 상황에 나를 놓이게 해서, 극한까지 나를 몰아붙여 발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늘 사전을 달고 다녔다. EDG에 있던 매니저 분들이나, 한국인 팀원들이 적응을 많이 도와줬다. 중국말을 못해도 잘 알아들으려고 해줬다. 나는 한 게 없다. 되게 운이 좋았다.”
애를 먹였던 언어의 장벽은, 공교롭게도 박도현이 기량을 되찾는 계기가 됐다.
“웃기게 들릴 수도 있겠다. 처음 갔을 때 할 수 있는 말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보이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게임을 했다. 그런 식으로도 게임이 잘 되고 통하니까 망설이고 주저했던 모습들이 사라졌다. 각이 맞다고 생각하면 들어갔다. 실패해도 다음이 있으니까, 동료들을 믿고 플레이했다.”
박도현은 EDG에서의 2년을 “잊을 수 없는 기억이고 추억”이라고 회고했다. 한국인 동료 ‘스카웃’ 이예찬과의 인연도, 그가 지난 2년의 중국 생활에서 얻은 값진 보물이다.
“처음 중국에 도전해 본 거고,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어서 너무 즐거웠고 행복했다. 2년을 하면서 더 배운 것 같다. 롤드컵을 우승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시작이더라. ‘다음 시즌은 더 잘 해야 된다’, ‘내년에도 남들보다 더 앞서나가야 된다’ 이런 게 있더라. 우승을 했지만, 다음 시즌엔 더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도 들더라. 영양가 있는 데이터를 많이 쌓아온 것 같다.”
“올해는 끝이 아쉬웠다. 4강까지 꼭 가고 싶었다. 이제 끝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쉽다. 사실 경기력만 봤을 땐 충분히 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얘기들을 많이 했다. 작년보다는 전체적으로, 개인적으로 기량이 조금은 떨어졌다고 생각해서 아예 패배를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올해는 힘든 일이 많았다. 실력으로 진 게임도 있었지만 운이 조금 안 따라줘서 아쉽게 패배한 경기도 조금은 있었다. 그런 게 쌓이고 쌓이니까 오래 합을 맞추고 큰 경기를 이겨 온 우리도 흔들리게 되더라. 조금 더 잘 잡아줬어야 되는데 그게 안 돼서 되게 아쉽다.”
“예찬이 형이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한국 돌아오기 전에 많은 얘기를 나눴다. 많이 도와줘서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고맙다. 내겐 은인이자 훌륭한 동료이자 친한 형이다.”
한편 한화생명은 박도현 영입에 이어 ‘킹겐’ 황성훈, ‘클리드’ 김태민, ‘제카’ 김건우, ‘라이프’ 김정민으로 이어지는 로스터를 완성했다. 롤드컵 우승자만 3명(황성훈‧김건우‧박도현)을 보유하며 우승권 전력을 구축했다.
“5명이 굉장히 플레이를 유기적으로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개인 실력은 롤드컵에 진출한 만큼 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다.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중이다”, “정민이는 라인전을 되게 잘한다. 잘하려고 하기 때문에 더 잘하는 것 같다. 되게 중요한 핵심을 잘 잡아주는 콜을 한다. 그게 좋다.”
“댄디 감독님, 모글리 코치님과 많은 연습 경기를 해보진 않았지만게임을 되게 잘 보시는 것 같다. 두 분의 의견이 잘 모이는 경향도 있다. 얘기가 잘 통해서 하고 싶은 얘기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굉장히 좋은 분위기다. 흐름만 우리가 탈 수 있다면 높은 곳까지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료들이 말이 많은 편이다. 나는… 사실 고백하자면 오랜 기간 중국말로 소통을 하다 보니 연습 경기에서 말이 잘 안 나오더라(웃음). 예를 들면 중국어로 말을 하려다가 머릿속에서 통역을 한 번 거친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좀 더 합을 많이 맞추면 체계가 정리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박도현이 다음 시즌 경계하는 팀은 T1과 담원 기아다. 올해 스프링 시즌 우승, 서머 시즌 준우승, 롤드컵 준우승을 차지한 T1은 로스터에 변화가 없어 내년에도 강력한 우승 전력이라 평가 받는다. 담원 기아 역시 ‘칸나’ 김창동, ‘데프트’ 김혁규를 품으면서 전력을 유지했다.
“T1과 제일 붙어보고 싶었다. 충분히 내년에도 잘 할 수 있는 팀이라 제일 경계하고 있다. 담원 기아도 ‘캐니언’, ‘쇼메이커’ 선수가 건재하다. 탑과 바텀도 어디까지 잘해질지 모르는 선수들이라고 생각한다. 두 팀이 가장 경계된다.”
“LCK에선 ‘룰러(박재혁)’ 선수와 가장 맞붙고 싶었다. 물론 (이적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T1의 ‘구마유시’가 박도현의 복귀를 반기더라) 구마유시 선수는 되게 잘하더라. 롤드컵에서 떨어지면 경기를 잘 안 보는 편인데, 이번엔 재밌어서 계속 보게 됐다. 꾸준히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확실히 그런 느낌의 원거리 딜러들이 잘 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 방송도 자주 보는 편인데 생각하는 것과 하는 말들이 나랑 비슷해서 재밌었다.”
박도현의 내년 목표는 플레이오프 진출과 롤드컵 진출이다. 그는 “가지고 있는 걸 모두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문대찬 기자 mdc0504@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