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실적으로 평가되고, 회사는 어떻게든 책임을 피해요”
영화 속 콜센터 상담사의 대사 한 마디에 전 객석이 맞장구로 들썩였다. 22일 오후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서울 CGV 여의도점에서 연 영화 ‘다음 소희’(감독 정주리) 시사회에 참석한 콜센터 근로자들은 모든 장면에서 공감이 밀려왔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극장을 찾은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소속 콜센터 근로자들로부터 영화 밖 소희 이야기를 들었다. 소재지와 업종은 다르지만, 콜센터의 근로조건은 △실적압박 △책임전가 △감정노동 세 단어로 요약됐다.
낮은 임금·무거운 책임… ‘이건 아닌 것 같다’
8년째 근속 중인 직원 월급은 최저시급을 약간 웃도는 정도다. 식사를 하거나 화장실 가는 시간을 아껴 고객을 응대한다는 전제다. 이미양 한국전력 CSC 서울고객센터 상담사가 풀타임으로 근무하며 평이한 실적평가 등급을 유지했을 때 받는 월급은 240만원이다.
“실적을 맞추기 위해 항상 쫓겨요. 모든 것이 다 실적이에요. 콜센터 상담사들이 화장실에 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물을 마시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죠. 실적이 부진하면 회사 측에서 면담에 들어갑니다. 영화에서 소희가 근무한 곳은 인센티브 제도가 있어요. 제가 근무하는 직장도 실적 순으로 상담사에게 등급을 부여해요. 등급에 따라 달마다 인센티브 금액이 달라져요. 제가 지금 8년 차 근무하고 있는데요. B등급을 받으면 인센티브 포함 월급 240만원이 들어와요. 풀타임으로 종일 근무입니다. 최저시급에서 조금 높은 금액이죠.”
월급에 비해 짊어진 책임은 무겁다. 신입 상담사들이 입사하면, 상담사들은 단기 속성으로 교육을 진행해야 한다. 송지현 삼성카드 고객서비스센터 상담사는 신입 상담사들을 교육할 때마다 자책감을 느낀다.
“콜센터에서는 단순 응대 업무부터 세이브(고객이 계약을 해지하지 않도록 설득하는 업무)까지 포괄적으로 교육을 진행해요. 교육 훈련에 쓸 수 있는 시간은 굉장히 빠듯해요. 신입 상담사들이 들어오면 한 달 만에 모든 교육을 몰아쳐 끝내죠. 저는 ‘자, 이제 전화를 받으렴’ 하고 신입들을 자리에 앉혀요. 카드를 써 본 적도 없고, 결제일이나 사용기간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 병아리 같은 아이들에게 말이죠. 신입 상담사를 가르치면서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폭언 들어도 무조건 친절… “회사 밖에서 말할 기운 없어”
언어 폭력에서 회복하는 데 주어진 시간은 15분이다. 송 상담사는 사측이 고객의 폭언을 들은 상담사에게 업무를 중단할 수 있는 쉬는 시간 15분을 부여하는 정책을 도입했다고 설명했다.
“제가 콜센터에 입사한 해가 2011년이에요. 신입 시절, 욕설을 퍼부으며 시작되는 콜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모르는 사람한테 심한 욕을 듣고도 죄송하다는 말만 해야 하는 상황이 힘들었어요. 저는 정말로 미안하지 않았거든요.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내가 왜 죄송해야 하는지, 일을 그만둬야 하나 한참 고민했어요. 지금은 폭언을 들으면 15분을 쉴 수 있어요. 10년이 지났지만, 바뀐 건 딱 15분이에요.”
전화기 밖 일상은 흐릿해진다. 감정 노동으로 생기는 스트레스 지수가 높지만, 이를 해소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 객석에서 만난 익명의 LH 한국토지주택공사 고객상담센터 상담사는 매일 수백명의 고객에게 친절한 말을 건네지만, 일터를 나서는 순간 말수가 없어진다.
“폭언을 들으면 쉬는 시간을 주는 회사가 있다니, 저희는 그런 거 없어요. 무조건 친절해야 해요.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도 예외는 없어요. 영화에서 소희가 떠날 때까지 아무도 소희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하잖아요. 많이 공감됐어요.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말을 하고 친절을 베풀다 보면 정작 가족이나 친구들과 대화를 못 해요. 말을 할 기운이 없으니까요. 지인들과 만나야 하면 꼭 주말로 약속을 잡아요. 평일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다음 소희’는 산업체로 현장실습을 나간 특성화고등학교 학생들이 열악한 근로조건 속에 방치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소희는 대기업 계열사인 통신사의 고객상담 업무를 하도급받은 콜센터에 들어갔다. 콜센터는 100%에 가까운 퇴사율을 기록하고 있었고, 직원 617명 대부분이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으로 채워졌다. 소희와 아이들은 고객의 폭언과 회사 측의 실적 압박에 시달린다.
영화의 시나리오는 2017년 1월 특성화고 졸업을 앞두고 콜센터에서 실습하던 홍수연 양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에 기반했다. 영화를 만든 정주리 감독은 소희 같은 근로자들의 비극이 반복되는 상황을 멈춰야 한다는 마음으로 영화 제목을 직접 지었다.
한성주 기자 castleowner@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