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과 함께 세상에 나온 가수 보아는 돌연 ‘3월13일 은퇴설’에 휘말렸다. 데뷔 24년차 ‘한류 황제’가 은퇴라니. 소문의 진원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보아 자신이다. 12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데뷔 20주년 기념 공연을 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번 공연을 끝내고 내일 은퇴한다더라고요. 공연이 너무 힘들어서. 하하하. 공연 콘셉트가 ‘다 같이 죽자’예요. 일명 자비 없는 콘서트죠.”
보아가 이렇게 과격한 농담을 던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공연 시작 후 약 30분간 쉬지 않고 무대를 이어갔다.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 하나만으로도 숨이 달릴 텐데, 보아는 춤추며 노래를 부르고도 여유가 넘쳤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와 목에 달라붙었지만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객석을 보며 싱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남을 시간 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해온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보아가 이날 부른 노래는 ‘넘버 원’(No. 1), ‘마이 네임’(My Name), ‘아틸란티스 소녀’, ‘걸스 온 탑’(Girls On Top) 등 약 30곡. 지난해 11월 낸 미니 3집 수록곡 ‘포기브 미’(Forgive Me), ‘브리스’(Breathe), 집(ZIP) 등 최신곡도 고루 선곡했다. 팬은 가수를 닮는다고 했던가. 관객들은 만족할 줄 몰랐다. 공연이 막바지에 다다른다는 보아의 말에 관객들은 일제히 “(공연을) 다시 해”라고 외쳤다. “더 불러주세요! 더, 더, 더!” 객석에서 이런 외침까지 터져 나오자, 보아는 “너 이리로 와. 나랑 싸우자”라고 응수하며 웃었다.
‘투혼’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공연이었다. 격렬한 춤을 추면서 라이브로 노래를 불러서만은 아니다. 30여곡 무대를 혼자 소화해서만도 아니다. 이날 관객에게 말을 거는 보아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코가 막힌 듯 비음도 심했다. 보아는 “한 달 동안 감기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좋아하는 술도 끊고 한 달 동안 공연 준비에만 매달렸지만,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고도 했다. 그런데도 노래할 땐 성대를 갈아낀 듯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부를 테니 ‘삑’ 소리가 나도 예쁘게 봐달라”는 부탁이 무색할 정도였다.
20년 넘게 활동한 데다가 히트곡이 워낙 많아 음원차트나 음악 방송에서 1위 한 곡으로만 선곡표를 채워도 너끈했을 공연이었다. 하지만 보아는 과거에 머무르길 거부했다. ‘발렌티’(VALENTI)를 라틴풍으로 편곡하는 등 히트곡에 새 옷을 입히고, ‘포기브 미’(Forgive Me) 부르면서 전자기타를 연주하는 도전도 불사했다. “보이는 게 전부라고 믿지 마/ 아직 다 안 보여줬어” 보아가 이날 들려준 노래 ‘우먼’(Woman) 속 이 가사가 무대 위 보아를 설명하는 듯했다.
전날부터 이어진 이번 공연 제목은 ‘뮤지컬리티’(Musicality·음악성). 보아는 애초 데뷔 20주년을 맞은 2020년 이 공연을 열려고 했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일정을 미뤘다.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보아가 한국에서 공연을 여는 건 3년4개월 만으로, 이틀 공연 모두 매진을 이뤘다.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가 경영권 분쟁으로 한 달 넘게 시끄러웠지만 보아는 끄떡없었다. 무대에서 혼을 불태우는 보아와 그런 그를 열정으로 응원하는 팬들 모습은, ‘SM 레거시’(SM의 유산)의 주인이 그들 자신임을 말하는 것 같았다.
“너를 사랑할 수 있는 건/ 나에게 행운이었어” 보아가 앙코르곡을 준비하려 잠시 무대를 비우자, 팬들은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보아의 데뷔음반 수록곡 ‘먼 훗날 우리’였다. 팬들은 ‘나의 청춘이 되어줘서 고마워. 새로운 스무 살을 축하해’라고 적힌 플래카드도 함께 흔들었다. 보아는 “내가 누군가의 청춘 속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는 게 너무나 뿌듯하다.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 달 부산으로 발걸음을 옮겨 또 한번 팬들을 만난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